제3부 케임브리지의 동양인-컴퓨터와 만나다 (4)
63년 2월부터 시작된 박사후과정 연구원 생활은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매우 여유가 많았다. 우선 연구원 급료가 지난 가을학기때 전자공학과에서 했던 교육조교(TA)의 그것에 비해 3배나 많았다. 유학생활 중 처음으로 여러 곳에 눈을 돌려보며 흥미있는 분야에 관심을 가져볼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온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오늘의 성기수가 있기까지 역사는 바로 이 박사후과정 연구원 시절부터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연구원 생활이 시작되면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던 성기수는 캠퍼스 근처의 낡은 월세방을 떠나 좀더 먼 곳의 넓은 집으로 옮겼다. 그동안 부리던 1백50달러짜리 「포드 벨에어(Ford BellAir)」도 팔고 8기통형 중고 「지엠 시보레(GM Chevrolet)」를 3백50달러에 새로 구입했다. 남은 5개월 동안의 연구원 급료는 열심히 저축해 귀국때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던 「국민주택」 한 채와 「새나라」 자동차 한 대를 구입할 요량이었다.
하버드대학교의 옌칭(燕京) 동양학도서관에서 즐겨보던 당시 「동아일보」 사회면에는 생활고로 일가족이 동반자살하는가 하면 연탄중독사니 강, 절도니 수해, 가뭄이니 하는 고국의 불우한 소식들이 자주 등장했다. 한번은 동아일보에 수재의연금을 보냈는데 즉시 이를 꾸짖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다. 친척과 친지 주변에 불우이웃이 많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의연금을 보낼 때는 익명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어머니의 충고는 백번 천만지당했다. 성능 좋은 8기통 시보레는 보스턴지역 한인들과 유학생을 사귀는 데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일요일이면 보스턴의 한인교회에 나가 사람들을 태우고 유원지나 대서양 연안을 드라이브하는 재미가 괜찮았다. 63년 3, 1절 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넓은 홀에서는 뉴잉글랜드(미국 북동부 6개주를 총칭)지역 한인들이 대거 참석한 대축제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서 성기수는 사회자로부터 하버드대에서 63년도 박사학위를 받은 세명의 유학생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돼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태어나 그토록 큰 박수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함께 소개된 나머지 두 사람은 정치학 박사 김경원(金瓊元, 전 유엔대사, 현 사회과학원장)과 경제학 박사 이봉서(李鳳瑞, 전 동자부 장관)였다.
63년 7월 귀국때까지 5개월 동안 성기수가 하버드대 응용물리공학부(Division of Engineering & Applied Physics) 연구실에서 했던 작업은 박사학위 논문 「유선형물체 주변의 자기유체역학(Magnetohydrodynamics:MHD)흐름 해법」을 다른 사람들이 쉽게 응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우주선 날개 내부의 자석과 전류배치가 날개 밖 공기의 흐름, 밀도, 압력, 전자장에 미치는 영향을 적분공식(積分公式)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적분공식을 수치로 계산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초음속으로 날고 있는 우주선의 날개는 다양한 비행속도, 날개모양, 자장(磁場)의 강도, 이온층의 전기 전도도(傳導度) 등에 대해 밀접한 영향을 받게 마련인데 이같은 조건들을 모두 계산에 넣어야 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전자기학의 맥스웰(Maxwell)방정식과 유체역학의 나비에 스톡스(Navier-stokes)방정식을 합쳐놓은 비선형(非線形) 편미분방정식(偏微分方程式)을 풀기 위해 연구실에서 종일 전동탁상계산기를 두드리다 지쳐 쉬고 있는데 한 동료가 옆방에 가면 더 좋은 계산기계가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기분이나 전환할 겸 옆방에 갔는데 그곳에는 하늘색 옷장 같은 대형 박스 여러개가 넓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곳은 하버드대 전자계산소였다.
옷장 같은 것들은 바로 IBM사의 제2세대 컴퓨터 「IBM 7090」이었다. 컴퓨터와의 난생 첫 대면이었다. 당시 컴퓨터 보급대수는 세계적으로 이미 1천여대가 넘어서고 있었지만 한국은 아직 단 한대도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한국은 4년 뒤인 67년 경제기획원에 1호 컴퓨터가 도입됐다.). 따라서 이날 성기수의 IBM 7090에 대한 견학은 가히 역사적인 일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60년을 전후한 세계 컴퓨터 개발역사와 기술동향을 살펴보기로 하자.
세계 최초의 컴퓨터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연구원 모클리(John W Mauchkly)와 에커트(John P Eckert)가 46년 공동으로 개발한 「에니액(ENIAC:Electronic Numerical Integrator & Calculator)」이다. 진공관을 이용한 제1세대 컴퓨터 「에니악」은 릴레이(Relay, 繼電器)를 이용한 기존 계산기보다 1천배 이상 계산속도가 빨라 미국국립항공우주국(NASA)의 로켓 탄도계산 등에 사용됐으나 기억장치 기능에 한계가 있어 다목적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었다. 모클리와 에커트가 레밍턴 랜드(Reminton Rand)사의 도움으로 51년에 개발한 기계가 최초의 상용 컴퓨터인 「유니백(UNIVAC:UNIVersal Automatic Computer)」이다(모클리, 에커트 회사는 곧바로 레밍턴 랜드사에 인수됐고 이 회사는 다시 55년 스페리사에 합병됐다. 스페리는 80년대 중반 버로스와 합병해 오늘날의 유니시스로 거듭났다).
에니액이 아직 계산기 수준을 벗지 못했다면 유니백은 프로그램을 내장하고 정역(正逆) 양방향으로 읽고 쓸 수 있는 자기테이프 장치를 보조기억장치로 채택한, 제1세대 컴퓨터로서 기본 구성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컴퓨터의 세대는 일반적으로 진공관의 전자흐름을 이용해 정보를 계산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한 것을 제1세대, 진공관 대신 반도체 회로소자인 트랜지스터를 이용한 것을 제2세대라고 한다. 58년 IBM이 트랜지스터를 이용해 만든 최초의 컴퓨터가 바로 초대형급 IBM 7090이다. 65년까지 6년 동안 약 3백여대가 공급된 IBM 7090의 구입가격은 당시 시가로 3백만달러(현재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약 1천9백만달러)나 되는 거액이어서 고객 대부분은 IBM으로부터 월세로 임대해 사용하고 있었다. 하버드대 역시 61년부터 이 기계를 월 7만달러에 임대해 사용중이었다.
IBM사 자료에 따르면 IBM 7090은 초당 22만9천번의 계산을 수행할 수 있는, 당시로는 놀라운 성능의 기계였다. 이 기계는 또 57년 IBM이 개발한, 본격적인 고급 컴퓨터언어 포트란(FORTRAN:FORmula TRANslation)을 지원할 수 있어 과학기술계산에 아주 적합하다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포트란 언어는 수학을 문자나 기호로 나타낼 수 있는 대수학(代數學, Algebra), 언어의 문법(Grammar), 프로그램의 구문작성 규칙(Syntax rule) 등을 정의한, 획기적인 프로그램언어였다. 실제 NASA는 58년부터 본격화한 미국 최초의 인간 우주비행계획인 「머큐리 프로젝트(Project Mercury)」와 2인승 인공위성 발사계획인인 「제미니 프로젝트(Project Gemini)」 등에 이미 IBM 7090 시리즈를 투입하고 있었다. 미 공군도 IBM 7090의 후속 모델인 「IBM 7094」를 탄도미사일조기경보시스템(BMEWS)용으로 도입, 80년대 말까지 무려 30년 동안을 사용하기도 했다. 64년 아메리카항공사(AA)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전화예약시스템 「SABRE:Semi Automatic Business-Related Environment)」도 두대의 IBM 7090을 엮어 구성한 것이었다.
하버드전자계산소를 견학한 다음날 IBM 7090의 사용법을 묻고 다니는 그에게 누군가 포트란 프로그래밍 입문서 한권을 구해줬다. 입문서를 읽으면서 성기수는 탁상계산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계산속도와 방대한 수치데이터와 계산과정까지를 조목조목 기억시킬 수 있는 컴퓨터의 능력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작업이나 연구 능률의 향상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인간으로서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던 크고 복잡한 연구에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가슴이 뛰었다. 인근 MIT 학부 학생들이 이미 박사후과정 연구원인 자신보다 훨씬 많은 급료를 받으며 프로그래머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것도 놀라웠다.
그날부터 성기수는 만사를 제쳐두고 포트란 언어를 배워 계산 프로그램을 직접 짜는 일과 컴퓨터서적 탐독에 몰두했다. 그가 얻은 결론은 한 가지, 컴퓨터 이용분야는 장차 인간 지적활동의 거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아직은 과학기술계산에 머물러 있지만 앞으로 컴퓨터는 자동차, 선박, 비행기, 공작기계, 방송, 통신, 신소재 분야는 물론이거니와 기업경영, 정부행정, 금융, 의료, 기상 등에 인간생활 깊숙이 파고들 것임이 분명했다. 귀국하면 우주선을 만드는 일보다 어쩌면 컴퓨터 이용기술의 산업분야 적용을 확산시켜 생산성을 높이는 일이 더 시급한 일일 것 같았다(훗날 성기수는 이날 하버드전자계산소에서 IBM 7090을 경험해보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인생항로가 크게 뒤바뀌어 있었을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서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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