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청년 성기수-괴짜 공군장교 (4)
성기수가 제11기 공군 각종장교후보생으로 입대한 것은 58년 4월이었다. 입대와 동시에 대전(大田) 근교의 공군기술교육단(空軍技術敎育團)에 입단했다. 이곳에서는 장교 임관을 위한 후보생 군사훈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58년 9월까지 계속된 5개월간의 고된 군사훈련 기간은 대학 4년 동안 고학으로 단련된 성기수에게는 차라리 호강이었다. 먹고 자게 해주며 의복까지 지급해 주니 그처럼 좋은 곳이 없었다. 대학원에는 휴학계를 낸 상태였으니 등록금 걱정에서도 해방됐다. 규칙적인 생활습관으로 한달 만에 체중이 5㎏이나 늘었다.
그러나 공군기술교육단에서의 군사훈련은 보통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훈련강도가 체력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덩치가 큰 미군용 군화와 군복을 착용하고 M1 장총을 앞에 든 장거리 구보(驅步)훈련은 11기 후보생 1백58명 가운데 왜소체격 10% 안에 속해 있던 성기수에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입대전부터 폐결핵 기미가 있었던 터라 시키는 대로 모두 따라 했다가는 탈진하거나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한번은 행군 도중 흐느적거리다가 길가에 쓰러진 일이 있었다. 체력이 다하기 전에 위기를 모면해야 된다는 계산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성기수는 교육단 내에서 약골이지만 최선을 다하는 후보생으로 통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동기생들 사이에서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괴짜로 취급된 것도 사실이었다.
성기수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시스템공학연구소(SERI)에서 재임한 28년 동안 그를 보아온 사람들은 그의 엄청난 족적(足跡)과 성과를 합리적 원칙주의자의 과실(果實)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이른바 「눈치」가 중시되는 동양에서는 그의 합리적 원칙주의가 환영받을 수 없다는 사족을 빼놓지 않고 있다. 69년 경제기획원 예산총괄과장으로서 예산업무 전산화를 계기로 성기수와 친해진 강경식(姜慶植, 전 재경원 부총리)은 「나는 성기수 박사를 좋아한다」 라는 글에서 그의 합리적 원칙주의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눈치」를 볼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후진국에서는 분야가 달라질 때마다 게임의 룰이 달라지는 사회다. 선진국은 정치, 경제, 교육 어느 분야에서나 그 원칙이 똑같이 적용되는 사회다. 따라서 복잡하게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는 사회이다. 그런 면에서 성(成)박사는 선진국형이다∥』 성기수의 「눈치 안보기」는 청년기의 절정인 공군장교 후보생 시절에서부터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공군기술교육단 생활중, KIST와 SERI에서의 28년 동안 행보를 미리 짐작케 해주는 몇 토막의 일화가 있다.
행군 도중 쓰러진 사건 이후 성기수는 2박3일의 종합야영훈련 때 숙직담당이 되어 내무반을 지키는 행운을 얻게 됐다. 숙직담당의 임무는 내무반 청소와 동기생들의 사물(私物)을 지키는 일이었는데 문제의 「팥앙꼬빵 사건」이 일어난 것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당시 공군기술교육단에서는 매일 저녁 후보생들의 간식으로 팥앙꼬가 든 빵 2개씩을 지급하고 있었는데 행정반에서는 훈련 사흘째가 돼도 빵을 수령해 가라는 연락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빵이 야영훈련장에 배급되지 않았다는 것을 안 성기수가 일직장교 심 소위를 찾아갔다.
『팥앙꼬빵 이틀 치 6백32개 수령하러 왔습니다.』
『이 XX 죽으려고 환장했나?!』
심 소위의 주먹이 얼굴에 날라왔다. 얼굴이 화끈하면서 별이 보였다. 정신을 가다듬고 재차 물었다.
『팥앙꼬빵 이틀치 어디 있습니까?』
『뭐 이런 XX가 다 있어!』
심 소위의 군화발이 연이어 정강이에 와 닿았다. 둘 만이 있는 일직실에서는 하늘 같이 우러러 보아야 할 대상인 현역장교와 인격은 임관 후에나 찾아가야 하는 후보생 간에 일방적인 구타가 계속됐다. 결국은 심 소위가 항복하고 말았다. 그날 성기수는 온전한 갯수는 아니었지만 심 소위로부터 4백74개의 빵을 회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기수는 이 사실을 동기생들에게 끝까지 공개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군기반장 사건. 교육단 측은 후보생들 가운데서 매주 군기장교 후보생을 한 명씩 임명하여 훈련이 없는 날 내무반 자체 질서와 군기유지의 책임 권한을 부여하고 있었다. 군기장교 후보생의 권한은 막강해서 동기생들 가운데 직각보행을 어긴 자, 복장불량자 등 규정위반자 등을 적발하여 처벌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규정위반 동기생들에 대해 못본 척하는 것이 미덕이어서 어쩌다 현역장교들에게 적발되면 전체가 군기불량으로 몰려 단체기합을 받곤 했다. 성기수는 이것이 불공평했다. 더욱이 규정을 위반한 자는 대개 건장하고 힘센 동기생들이었는데 반해 함께 단체기합을 받고 혼쭐이 나는 이들은 체격이 왜소한 약골들 뿐이었다.
참다 못한 성기수가 구대장에게 자신을 군기장교 후보생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군기장교 후보생이 된 성기수는 규정위반 동료들에 대해 가차없이, 야간에 방공호를 파는 중노동과 같은 처벌을 내렸다. 성기수로부터 수모를 받은 동기생들이 밤마다 그를 불러내 화장실에 처넣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성기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희들이야말로 살인죄와 항명죄로 군법회의에 회부돼 총살형에 처해지도록 이미 내 유언장에 써놨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동기생들은 침묵했고 결국 그의 군기장교 후보생 임기 동안 단 한 번의 단체기합도 없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성기수는 동기생들로부터 괴짜로 소문이 났다. 동기생들에게 비친 성기수의 괴짜성은 5개월의 훈련기간 동안 딱 한 번만 다녀온 일요일 외출에서도 여실히 증명됐다. 교육단은 일요일마다 후보생들에게 외출을 허용, 휴일을 만끽하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일요일마다 텅 빈 내무반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성기수 차지였다. 하지만 그에게 일요일은 마냥 즐거운 날이었다. 턱없이 부족한 시간과 시설 때문에 밀렸던 빨래와 목욕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맑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며 미래를 설계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인류와 우주와 수학의 세계∥. 이런 시간들은 대전시내 극장과 다방 그리고 주점을 전전하고 있을 동기생들의 그것보다 확실히 즐겁고 유익한 것이었다.
58년 9월 성기수는 5개월의 군사훈련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했다. 한달 동안 교관 소양교육을 받은 뒤 곧바로 진해에 위치한 공군사관학교 교수부 항공역학교관실 근무를 명받았다.(공사는 그의 부임 한달 만에 서울로 이전했다)
공사 교관생활은 육체적으로 고되거나 시간이 없어 쩔쩔매는 경우는 없었지만 내부 행정체제는 자유당 정권 말기의 부패상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도 성기수의 원칙주의는 여지없이 발휘되곤 했다. 한번은 이런 사건이 있었다.
공사에서는 교관들의 봉급외에 매달 1일 교관 수당이라는 명목으로 소정의 교재연구비를 지급하도록 돼 있었는데 웬일인지 몇 달이 지나도록 깜깜무소식이었다. 20여명이나 되는 공군기술교육단 동기생들은 이 같은 사실을 알고도 지방으로 전출될까봐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가만 있을 성기수가 아니었다. 월급만으로 생계비와 대학원 등록금을 해결하고 거기에다 고향의 어머니에게 송금할 돈까지 필요했던 터였다. 행정병으로부터 신임 교관수당이 행방불명 됐음을 확인한 성기수는 소령 계급의 경리과장을 찾았다. 소령에게 깍듯이 경례를 붙인 다음, 즉각 행방불명된 수당에 대해 따졌다. 자신보다 20㎝쯤 키가 작은 신참 소위가 당돌하게 나서자, 어이없어진 소령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방에서 당장 나갓!』
그러나 성기수는 침착했다. 상급자의 명령대로 경리과장 방을 나온 다음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 경례를 붙이고 수당문제 해명을 요구했다. 이런 촌극을 몇 번 반복하는 사이 소령은 마침내 성기수가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는지 몇 시간을 기다려 주면 조사해 보겠노라며 손을 들고 말았다. 몇달 치 밀렸던 동기생들의 교관수당은 그날 저녁 전부 지급됐다. 동기생들은 성기수의 용기에 대해 감탄하면서도 그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 보복이라고 할만한 일은 그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59년이 되면서 성기수는 드디어 항공역학 강의를 배정받았다. 몇 날을 다듬고 다듬은 교안을 들고 3학년 생도반에 첫 강의를 들어갔다. 반장생도가 『차렷!』 『강의 준비 끝』을 외쳤는 데도 많은 생도들이 잡담을 중지하지 않았다. 생도들이라 하지만 성기수 자신과 거의 동년배들이었고 생도들 역시 교관이 이제 막 임관한 신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았다. 성기수는 교실 분위기가 완전히 잡힐 때까지 10여분 동안을 반장생도를 향해 『다시!』를 외치며 생도들의 『차렷』교육을 시켰다.
생도들 사이에 신참 교관 성기수의 명성은 그렇게 각인됐다. 59년 말 3학년 생도 한 명이 항공역학 등 몇 과목의 성적이 나빠서 퇴교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공사교육위원회가 소집되었다. 다른 과목의 교관들은 문제의 생도를 개별지도해서 4학년 진급 후 수업에 지장이 없도록 하겠다고 증언했다. 마지막으로 항공역학 교관 성기수의 증언 차례가 됐다. 하지만 성기수는 증언을 거부했고 생도는 퇴교 당하고 말았다. 유리하게 증언하더라도 문제의 생도가 4학년 진급 후 성적이 나아지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사에서는 학과성적을 이유로 생도의 퇴교를 밀어붙인 강경파 교관은 없었다.
이 사건 이후 성기수는 공사에서 가장 무서운 호랑이 교관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항공역학 과목을 소흘히 하는 생도들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서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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