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8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무장 탈주사건의 주범이 경찰과 장시간 대치극을 벌이다 절규하듯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을 내뱉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한마디는 당시 정의의 개념 자체가 뒤죽박죽이 된 사회적 병리현상을 꼬집으면서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뼈있는 현실풍자는 요즘도 범죄자들이 걸핏하면 되뇌는 금과옥조가 되고 있다.
자기 전처와 그녀의 남자친구를 살해한 증거가 거의 확실한 데도 미국 최고의 변호사들의 변호로 결국 무죄석방된 O.J. 심슨 사건이 남긴 메시지는 미국에서도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통한다는 것이다. 그가 만일 돈이 없었다면 그의 재판은 9개월까지 끌지 않고 단 9일 만에 끝났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어느 곳이든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힘이다. 힘의 실체는 권력과 돈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유행가 가사도 있듯이 힘이 있는 사람은 승자가 되게 마련이다. 후진국일수록 이런 힘의 논리가 지배적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최근 과천관가에도 이러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장이 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유력무죄 무력유죄」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조직개편심의위원회가 작고 효율적인 정부 구축을 목표로 구상한 중앙부처의 직제개편과 인력조정방안이 정작 손을 대야할 부처보다 힘없는 부처, 말단 공무원에게 칼날이 가해지도록 만들어져 이를 빚대어 나온 말이다.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질타받던 재정경제원은 이번 개편으로 인력이 증원되는 효과를 얻은 반면 정보화, 기술경쟁시대에 정책비중이 더욱 높아져야 할 과학기술부, 정보통신부, 산업자원부 등 힘없는 부처들은 대폭적인 인원감축 대상이 됐다. 그뿐만 아니라 고위직보다 5급이하 하위직 공무원이 나가도록 짜여 있다. 사람들이 흔히 「현실논리」를 가지고 자신을 변호하듯 절대숫자가 많은 하위직의 대량감축이 당연하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비율로 따져도 하위직이 훨씬 많다.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사는 한 현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순된 현실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수용해서는 곤란하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정부조직개편은 정작 일을 해야 할 부처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작고 효율적인 정부는 경쟁력 향상을 목표로 하는 만큼 공무원의 사기를 높일 수 있도록 경쟁력 있는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만 국제통화기금(IMF)한파를 극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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