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산업은 우리나라 총수출액의 10% 이상을 책임지고 있는 대표적인 수출형 산업이다. 97년 조립분야를 포함한 총 수출액은 1백75억달러 규모. 전년의 1백78억4천3백만달러에 비해 1.9% 정도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수출 1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반도체 수출의 맑음과 흐림에 따라 국내 전체 수출기상도가 변할 만큼 반도체산업이 전체 수출전선에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반도체 수출의 안쪽을 들여다보면 희망적인 부분이 그리 많지 않다.
95년 최고의 해를 보내며 수출 역군의 칭호를 받았던 반도체산업은 96년과 97년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가격폭락이 거듭되면서 적자 수출행진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급기야 97년 하반기에는 간판 제품인 16MD램이 심리적 마지노선이라고 불리는 3달러선을 깨뜨리고 결국 원가에도 못미치는 2달러선 이하까지 내려가고만 것이다.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D램 등 일관공정 제품의 수출액은 96년 1백6억7천9백만달러보다 15.8% 감소한 90억달러선에 머물렀다.
이같은 부진으로 국내 반도체산업의 세계 시장점유율도 지난 95년 11.2%에서 96년 9.0%, 97년 7.3%로 2년 연속 줄어들고 있다. 팔면 파는 대로 남는 장사였던 D램 사업은 이미 적자수출의 대명사로 전락한지 오래다.
이처럼 반도체산업이 수출 효자상품에서 하루아침에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것은 무엇보다 구조적인 문제점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막대한 시설투자와 우수한 공정기술을 앞세운 국내 반도체산업이 96년부터 D램가격 하락과 경쟁국들의 견제로 매출확대에 한계를 보이고 있는 것은 지나치게 메모리분야에만 편중된 사업구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산된 제품(메모리)의 85%를 수출하고 수요(비메모리)의 75%를 수입하는 기형적인 구조에서 국내 반도체산업의 문제점을 찾아야 할 것으로 진단된다.
부가가치가 낮은 메모리 제품을 대량생산해 싼값에 수출하고 대신 부가가치가 높은 비메모리 반도체를 높은 값으로 수입하는 현재의 구조로는 반도체산업의 경쟁력 확보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국내 반도체산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산업같이 수출 활로를 개척하기 보다는 사업구조의 고도화를 통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근본적인 처방이 앞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 96년 이후 가격하락에 시달리기 시작한 국내 반도체업체의 전략은 대부분 글로벌화에 집중돼 왔다.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산업 가운데 반도체만큼 글로벌화가 강조되는 산업도 드물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전체생산의 90%에 가까운 물량을 수출시장에 의존해야 하는 시장구조 때문이다.
또한 작금의 세계 반도체시장 환경은 개발, 마케팅 등 모든 것을 국제적인 협력없이 혼자 해나가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특히 D램 비중이 거의 전부인 우리나라 업체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2000년 반도체시장은 투자위험도 커지고 표준화문제가 시장을 주도하는 최대 관건이 될 것이다. 특히 표준화는 유력업체간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를 위한 공동개발, 마케팅은 물론 현지 생산에 적극 나서야 할 시점이다』는 한국반도체산업협회 김치락 부회장의 진단은 그런 의미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국내 반도체업계는 수년 전부터 현지생산을 위한 행보를 재촉해왔다. 무엇보다 무역 블록화에 대응하고 반덤핑 등 통상마찰 소지를 제거한다는 목적에서다.
특히 중국, 필리핀, 포르투갈 지역에 진출한 조립공장은 현지의 저임노동력 활용과 함께 현지시장 공략의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반도체업체의 한 관계자는 『후발업체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마케팅 능력이다. 현지생산은 생산과 시장을 연결하는 글로벌 네트워크형의 이상적인 마케팅체제로 고객의 요구에 언제든지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라고 글로벌화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실제로 반도체투자는 이제 단일 회사 혼자하기엔 투자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통상적으로 설비투자비는 연간 매출의 30% 이상 수준에 이르고 개발비만도 10%를 상회하고 있는 것이다. 16MD램 1개 라인 구축 때 소요비용이 10억달러대였다면 1GD램은 최소 1백억달러를 넘는다는 게 일반적인 계산이어서 웬만한 유력업체라도 단독 투자는 무리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 때문에 IMF사태가 터지기 전만 해도 국내 반도체업체들의 해외생산기지 및 연구개발(R&D)센터 구축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됐다.
삼성, LG, 현대 등 반도체3사는 올해부터 오는 2001년까지 국내는 물론 미국, 유럽, 동남아 등지에 D램을 비롯해 비메모리 파운더리 및 디스크리트 제품을 주력 생산하는 8개 이상의 일관가공라인(FAB)을 신규로 구축하는 중장기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같은 반도체3사의 해외투자 계획이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메모리보다는 비메모리분야 투자가 많아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반도체 3사는 미국, 영국 등지에 건립을 추진중인 현지공장의 생산주력제품을 비메모리로 전환하거나 해외유력 비메모리업체 인수를 통한 「비메모리사업 강화」방향으로 사실상 의사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이는 반도체사업의 글로벌화와 반도체 산업의 균형적인 발전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최적의 대안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특히 반도체3사는 해외투자가 활성화될 경우 비메모리 제품개발의 관건인 고기술 습득과 디자인 전문인력 보강이 용이해져 그동안 국내 반도체산업의 최대 취약부분으로 지적돼온 D램 위주의 생산구조에서 더욱 빨리 탈피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갑자기 불어닥친 IMF한파는 이같은 업계의 자발적인 구조조정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해외에서 투자자본 조달방법이 아예 봉쇄되고 있는 것이다.
소자부문의 어려움과는 대조적으로 그동안 낙후산업으로 지목돼왔던 반도체 장비산업은 오히려 수출로 활로를 열어갈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반도체협회가 최근 발표한 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반도체장비 수요는 크게 감소했는데도 국산 반도체장비의 해외수출은 오히려 대폭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국내에서 생산된 반도체장비는 총 6억8천7백만달러어치 정도로 이 가운데 16, 인 1억1천2백만달러어치가 수출됐다.
특히 화학증착장비(CVD), 트랙, 웨트스테이션 등과 같은 반도체 전공정 장비의 경우 지난해 총 2억달러어치가 생산돼 3천1백만달러 가량이 수출됨으로써 전년대비 3백% 이상의 높은 수출 증가율을 기록, 전공정분야가 향후 반도체장비 수출의 주력품목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이러한 반도체장비의 수출확대는 국내 수요의 경우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데 반해 미국, 대만, 말레이시아 등 해외시장 수요는 오히려 크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국내 주요 장비업체들은 소자업체와의 해외 동반진출을 적극 모색하는 동시에 외국법인 설립 및 현지 생산을 추진하는 등 국산장비의 해외 수출경쟁력 강화쪽에 사업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난해 국내 반도체장비업체 최초로 미국 현지에 단독 법인을 설립한 케이씨텍은 주력제품인 가스공급장치는 물론 스크러버, 퓨리파이어 등의 수출을 추진하는 동시에 올해부터 조립생산을 시작해 장기적으로 이를 현지 생산기지로 활용할 계획이며 영국 현지법인 설립도 검토중이다.
반도체용 클린룸 생산업체인 신성이엔지도 최근 시장다변화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판매정보망 구축을 위해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 지사를 설립하고 신규물량 수주 및 사후 설비관리를 수행하는 한편 향후 3년간 현지화 과정을 거친 후 합작업체를 선정, 현지 법인화할 계획이다. 반도체설비업체인 성도엔지니어링은 지난 연말 싱가포르 및 말레이시아 지역에 현지 업체와 공동으로 합작법인을 설립하고 웨이퍼 가공 관련공사 및 설비의 본격적인 수출에 나섰으며 올해는 대만 지역에도 합작 법인을 설립한다. 또한 저압화학증착장비(LPCVD) 생산업체인 주성엔지니어링이 미국 오스틴 지역에 AS 사무소를 개설한 데 이어 조만간 미국 유진과 영국 지역에도 연락 사무소를 열 계획이며 아펙스, 선익 등 화학증착장비(CVD) 생산업체들도 미국 현지에 「AJUSUN」이라는 공동 판매법인을 최근 설립했다. 몰딩 장비 업체인 한국도와가 올해 중국 및 동남아 지역에 부품공급 및 AS를 담당할 현지 판매법인을 설립할 계획이여 같은 경쟁 업체인 한미금형도 말레이시아에 이어 필리핀에 조립공장을 갖춘 현지법인을 올해 설립키로 했고 레이저 마킹 장비 생산업체인 이오테크닉스가 오는 상반기까지 싱가포르, 필리핀, 대만, 중국 등 4개 지역에 현지 AS사무소를 잇달아 개설할 방침인 데 이어 동종 업체인 동양반도체장비도 태국에 지사설립을 검토중이다. 이밖에 상당수 업체들도 그동안 해외에 진출한 국내 소자업체 및 주요 해외거래처의 장비 유지, 보수를 위해 운영해왔던 연락사무소를 현지 시장공략을 위한 판매 현지법인으로 전환할 계획이어서 국내 장비업체의 해외지사 설립은 더욱 활기를 띨 전망이다.
이같은 국내 장비업체들의 해외시장 거점확보 노력은 국내 소자업체들의 해외진출에 대응한다는 측면과 함께 현재와 같은 국내상황에서 세계시장을 무대로 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의 결과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러한 상황변화에 힘입어 올해는 국산 반도체 장비의 해외 수출 규모가 1억8천만달러를 기록하고 내년에는 2억달러 수준을 돌파하는 등 연평균 20% 이상의 높은 수출 신장률을 보일 것으로 협회측은 전망했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 생산되는 반도체 장비의 해외수출 비중도 올해 26.8%에 이어 내년에는 36.8%를 훨씬 상회할 것으로 예상돼 향후 국산장비의 주력시장 전체가 내수에서 수출시장 위주로 빠르게 옮겨갈 가능성이 크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따라서 향후 국내 장비업체의 생존 여부는 내수시장에서의 성공보다는 해외시장에서의 제품경쟁력에 의해 좌우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최승철, 주상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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