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갈모"의 약속

劉壽根 두인전자 연구소장

새해가 되면 언제나 올 한해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 것인가 하고 생각한다. 21세기까지 불과 3년 밖에 남지 않은 이때 20세기를 어떻게 마무리하고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을 것인가를 서서히 생각할 만한 시기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현실은 3년 앞으로 다가온 3번째 밀레니엄은 고사하고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시대 속에 있다. 그래서 더 더욱 어떻게 해야 이 위기상황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깊이 생각하게 된다.

국가신인도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부도는 급증하고 있으며 금리와 실업률은 치솟고 있다. 정부의 보호막을 잃은 기업은 자생을 위한 뼈저린 구조조정을 서두르고 있다. 어떻게 해야 회사를 키울 수 있을까가 아니고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가 기업의 대명제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구조조정을 서두르는 이유는 경쟁력을 강화시키기 위함이다. 우물안 개구리식 경쟁력이 아닌, 진정한 국제경쟁력을 갖추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자연히 한 해동안 어디에목표를 두고 살아야 할 것인지가 정해지는 느낌이다. 구조조정의 외형적인 모습은 감봉이니,감원이니, 수익성 없는 사업의 정리니,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인 모습을 떠나 우리 자신에게 『경쟁력을 갖추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하고 질문을 던져 보자. 지금 필요한 것은 크고 거창한 목표가 아니다. 아주 작은 것 하나가 더 소중하다. 그래서 『일단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자』고 권하고 싶다. 경쟁력 강화와 약속 지키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위기의 근본을 돌이켜 보면 그것은 국가 신인도 하락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갚겠다는 약속을 믿지 못하니 돈을 빌려줄 수 없고 제품을 믿지 못하니 물건을 사가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신인도 회복을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매일매일 신문을 통하여 절감하고 있다. 한 번 잃은 믿음을 다시 제 자리에 돌려 놓으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할지 짐작도 안간다.

이런 일화가 있다. 정조 때의 명신 정홍순은 언제나 갈모를 두 개 준비하고 다녔다. 하나는 자신을 위함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기 위함이다. 그가 아직 젊었을 무렵, 당시의 임금인 영조께서 동구능에 거동하시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옆에 선 젊은이가 갈모가 없어 낭패해 하기에 정홍순이 이를 빌려주었다. 젊은이는 이튿날 반드시 돌려주기로 약속을 하고 서로 주소를 교환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그 젊은이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정홍순은 별 수 없이 그 젊은이를 찾아가 갈모를 되돌려 받았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난 후 정홍순은 호조판서라는 높은 벼슬에 올랐다. 하루는 좌랑이 새로이 발령을 받아와서 신임인사를 하는데, 자세히 보니 옛날 갈모를 빌어갔던 그 젊은이가 아닌가. 그 사람도 알아보고 크게 놀랐다. 정홍순은 『그대가 갈모 하나를 돌려주지 않았으니 신용 없음을 가히 미루어 알 수 있다. 어찌 국가의 막중한 재정을 다룰 수 있겠는가』하고 젊은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젊은 시절 그 간단한 약속 하나를 지키지 못함으로써 이 젊은이의 벼슬길은 닫히고 말았다.

약속을 지키려면 내가 하는 약속이 과연 지킬 수 있는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수출에 있어서는 한 번 약속을 어기면 그 다음 기회는 없다. 환율이 상승된 덕분에 올해는 누구나 수출을 늘리려 하고 있는만큼 어느 때보다도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는 신중함이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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