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mm 웨이퍼 표준화 잠정합의

세계 반도체업계와 관련 단체들이 3백mm(12인치)웨이퍼 표준화를 위한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미국 아시아 유럽의 13개 반도체업체로 구성된 「인터내셔널 300mm 이니셔티브(I300I)」와 일본업체 주축의 11개사로 구성된 표준화단체 「300mm반도체기술연합회(J300)」는 지난 7월, 12인치 웨이퍼를 사용하는 차세대 반도체 제조기술 규격을 공동 제정한다는데 잠정 합의한 바 있다. 이후 지금까지 나타난 양대 산맥의 활발한 움직임은 웨이퍼의 12인치 표준화가 목전에 와 있음을 실감케 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웨이퍼 표준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사실은 표준화 작업에 세계 각국이 참여하고 있으나, 그 내막을 자세히 살펴보면 미국, 일본 등 주요 반도체국가들의 이해가 절대적으로 반영돼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는 지난 수십년간 전자산업의 실질적인 견인차 역할을 담당해 왔다. 반도체의 역사는 간단하게 성능 향상과 가격 절감의 역사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다. 이 때문에 업체들은 기술혁신을 통한 성능 향상과 가격 인하로 역사를 이끌어 왔다.

반도체업계는 수율 향상과 시간당 생산개수(스루풋) 증강 등 생산성 향상을 통한 가격 절감 방법 이외에 가공기술의 미세화를 통한 칩의 소형화와 웨이퍼 대구경화를 통한 가격 절감에도 심혈을 기울여 왔다. 내년에 도입될 것으로 보이는 3백밀리웨이퍼와 0.25미크론 미세가공기술도 이같은 대구경, 미세화라는 맥락에서 추진된 것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반도체업체들은 독특한 공장 레이아웃, 노하우,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장비와 재료를 사용하는 것을 당연시해 왔다. 그러나 3백mm 시대 개막을 앞두고는 전세계 반도체업체들이 장치와 재료를 표준화해 막대한 투자비를 줄이는 쪽으로 사업의 가닥을 잡고 있다.

사실 미국이 주체가 돼온 국제반도체제조장비재료협회(SEMI)는 70년대 설립될 당시부터 웨이퍼 표준안 등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1백50mm(6인치)웨이퍼 이전까지는 세계 대부분의 반도체업체들이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반도체업체들로서는 각 업체별로 반도체 생산을 추진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술적으로 앞서있는 업체들의 경우는 자사의 앞선 기술을 노출시킬 위험이 있는 표준화 작업에 참여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웨이퍼의 표준화를 가장 먼저 제창한 쪽은 기술적으로 가장 앞서있는 미국 반도체업체들이었다는 점은 하나의 아이러이이다. 물론 미국 업체들이 처음 제창할 당시의 표준화는 자국 반도체산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미국은 지난 87년, IBM 인텔 등 주요 반도체업체 8개사를 주축으로 반도체제조기술협동조합(세마텍)을 결성했다. 그 배경은 일본업체들의 86년 반도체 총생산액이 미국의 총생산액을 넘어서면서 심각한 위기감이 형성된 점이다. 세마텍은 SEMI와 손 잡고 미국 자본의 제조장치업체에만 기술 정보와 개발 비용을 지원해 미국장비업계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려 했다. 이와 동시에 차세대 반도체개발의 로드맵 작성과 제조공정의 표준화를 추진, 반도체 업체 각사의 투자 부담 경감을 노렸다. 그 효과는 93년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93년 미국의 반도체 총 생산액은 다시 일본을 앞질렀다. 즉, 이 당시 미국의 웨이퍼 표준화는 자국 산업을 위한 것이었고 사실상 지금의 표준화 제안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일본 반도체업체들의 적극적인 표준화 움직임도 이러한 국가 이익 확보 차원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않는다. 미국업체들이 표준화에 적극성을 보이던 당시 일본 반도체업계는 D램 덕분에 전체적으로 크게 호조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 94년과 95년은 4MD램 수요가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SEMI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던 표준화 활동에 협력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 때문에 일본업계는 SEMI와 별다른 공조관계를 유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미국세력에 대비해 그들 나름대로의 표준화 작업을 추진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일본업체들의 이러한 치밀한 준비 작업은 3백mm 시대를 앞두고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일본업체들은 미국 주도의 표준화 작업에 합세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표준화 과정 전체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즉, 미국에 유리한 표준에 일본이 굴복하는 형태로 표준화 작업이 추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측은 자신들의 업계 영향력을 바탕으로 미국업체들에 익숙한 방식뿐 아니라 자국 업체들이 널리 사용하고 있는 방식을 병행 표준으로 강력히 주장해 이를 관철시키고 있다.

이처럼 미국은 일관된 주도적 자세로, 일본은 결코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지 않은 방향으로 3백mm 표준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는 세계 주요 반도체업체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3백mm웨이퍼 표준화작업에 직간접으로 관여하고 있다. 반도체제조라인은 거액의 투자를 필요로 한다. 게다가 미세화와 대구경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1개 라인이 필요로 하는 투자액은 커진다. 독자적으로 추진할 때 얻을 수 있는 장점보다 표준에 따르는 가격 절감에서 생기는 장점이 훨씬 크게된 것이다.

또 전세계적인 반도체산업의 불황도 큰 이유가 됐다. 반도체업체들은 산업 흐름상 3백mm웨이퍼를 언젠가는 채용해야 한다. 단지 악화일로의 경영환경에서 이를 다른 업체들에 비해 한발 빨리 채용할 것인가 아니면 상황을 지켜보면서 서서히 도입할 것인가라는 도입 시기만이 문제가 될 뿐이었다. 위험부담 때문에 먼저 추진할 수도 그렇다고 뒤쳐질 수도 없는 반도체업체들에게 있어 3백mm 표준화 움직임은 다소 위안이 되는 화두며 어쩌면 각 업체들의 입 맛에 딱 맞아 떨어지는 사안이었던 것이다.

3백mm웨이퍼는 오는 99년부터 반도체 산업계에서 표준 웨이퍼로 자리잡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에 따라 올해부터 세계 반도체 관련업체들의 최대 관심은 3백mm 표준화와 실용화 문제로 집약될 것이 확실시 된다.

<심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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