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브> 에디슨 탄생 150주년

1847년 미국 오하이오주 밀런에서 태어나 84세를 일기로 타계한 토머스 A.에디슨은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명언을 남긴 위대한 발명가다. 풍부한 창조력과 불굴의 탐구심으로 전신 축음기를 비롯 전기투표기록지, 축음기, 백열전등, 발전기, 발전기, 배전방식, 활동사진기(현재의 영사기) 등 3천여종에 이르는 문명의 이기를 발명한 그의 기발한 착상은 지구촌의 생활문명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특히 1879년 10월21일에는 인류에게 빛나는 승리를 안겨줬다. 백열전등을 개발함으로써 인간에게 최초의 불을 준 그리스신화의 프로메테우스에 버금가는 찬란한 문명의 불빛을 밝히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러한 실용적인 백열전등의 발명은 등화의 일대 혁명이 되어 발전기, 배전반, 배전방식의 설정과 함께 전기사업 확립의 기초가 되었다. 1887년 경복궁에서 있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등화도 에디슨 발전기상회에서 도입한 발전기를 통해 이뤄진 것이고 원자력, 정보통신, 일렉트로닉스의 눈부신 발전도 에디슨 발명품이 기초가 되는 등 산업계에 미친 영향도 엄청나다. 현대문명에서 에디슨의 공적을 제하면 역사의 흐름이 수십년 후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욕타임즈」는 에디슨 두뇌에 의한 산물이 무려 1백50억달러(당시 금액)에 이른다고 1923년 보도한 바 있다. 미국 산업에 미친 영향만을 환산한 이 액수은 미국대륙 발견 이래 광산에서 채굴한 모든 금을 합친 금액의 20%에 해당된다고 하니 전세계에 미친 파급효과는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다.

영국의 저명한 물리학자인 로드캘빈은 간단한 전력송선의 간지선방식 원리를 다른 사람이 발견치 못했던 이유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답은 어떠한 사람도 에디슨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라고 응답했다는 일화도 있다.

왕성한 발명욕으로 자신의 사전에서 만족이라는 두글자를 삭제해 버린 에디슨은 자신을 과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신문기자가 그를 과학자라고 부르자 『그것은 틀린 말이다. 패러데이(영국의 실험물리학자)는 과학자지만 나는 발명가다』라고 응답할 정도였다.

올해 에디슨 탄생 1백50주년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발명가를 홀대하는 풍토가 사라지고 아울러 획일적인 과학교육도 개선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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