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특집] 세탁기 사업구조 조정 바람

국내 세탁기업계에 사업구조 조정의 바람이 불고 있다.

국내 세탁기업체들은 세탁기 사업의 기반을 해외 시장으로 옮기면서 생산과 판매에 걸쳐 해외 전진기지를 잇따라 확충하고 있다. 고급제품을 중심으로 저마다 글로벌한 상품을 만들기 위한 독자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또 달라질 시장 환경에 대응해 새로운 개념의 제품 개발을 위한 기반 구축에도 골몰하고 있다.

이같은 움직임은 국내 시장이 한계 상황에 이른 데 따른 것인데 앞으로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국내 세탁기 시장은 수요가 포화되면서 컬러TV, 냉장고 등에 이어 이미 성숙기 시장에 접어들었다.

지난 93년 1백56만여대를 정점으로 국내 세탁기 수요는 94년 1백41만대, 95년 1백37만여대, 96년 1백35만대로 해마다 위축되고 있다.

가전업체들은 올들어 고급 제품을 중심으로 제품 구색을 강화했으며 소비자의 대용량 제품 선호 추세에 힘입어 올해 세탁기시장 규모는 지난해의 6천억원보다 1백억∼2백억원 정도 증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난 상반기까지 2천7백억원을 기록했고 오는 9월부터 11월까지의 성수기가 있다는 점을 고려한 전망이다.

그렇지만 판매물량만큼은 지난해보다 감소한 1백30만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앞으로 국내 세탁기 시장에서 수요 증가를 당분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이와 달리 해외 세탁기 시장에 대한 전망은 상당히 낙관적이다. 주력시장인 동남아에서 경쟁사인 일본업체의 입지가 약화되면서 국산 제품의 수출 확대가 기대되고 있다. 또 중남미, 중동, 러시아 등 신규시장의 개척이 활발해지고 있다. 지난 상반기동안 수출된 국산 세탁기는 지난해보다 30% 가까이 증가한 1억6천만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이전에 주력 제품이었던 2조식 세탁기를 대신해 부가가치가 높은 전자동 세탁기의 실적이 업체마다 50% 가량 늘어나고 있는 것은 청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가전업체들이 해외시장 공략을 세탁기 사업의 승부처로 점찍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해외시장 공략의 형태는 최근들어 국내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방식에서 현지에서 직접 생산해 판매하는 형태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른바 해외 전진기지의 구축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중국 소주의 가전생산단지에 연간 최대 20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세탁기 공장을 신설했다.

초기에는 중국과 동남아 시장에 주로 공급하다가 앞으로 생산규모 확대와 함께 수출지역도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 등지로 넓혀갈 계획이다. 또 유럽시장을 겨냥해 스페인의 복합가전단지에 세탁기공장을 신설한다는 장기 계획도 갖고 있다. 삼성전자보다 먼저 중국 남경에 연산 25만대 규모의 세탁기 생산기지를 구축한 LG전자도 해외 생산기지의 확충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최근 태국에 2조식 세탁기공장을 건설하고 있으며 앞으로 2∼3년 안으로 인도와 중남미지역 한곳에 세탁기 공장을 추가 건설할 예정이다. 오는 2000년대초께 전체 세탁기 생산량 가운데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생산할 계획이다.

대우전자는 멕시코와 폴란드에 이어 베트남과 인도에 세탁기공장을 신설하는 등 오는 2000년까지 모두 10곳에 해외공장을 세울 계획이다. 아울러 대우전자는 「월드워셔」라는 이름 아래 지역별로 차별화한 상품을 집중적으로 출시해 시장 점유율을 높여가 2000년께 세계 시장에 모두 4백만대를 공급하는 최대 세탁기업체로 부상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LG전자는 현재 칠레, 파나마, 싱가포르, 사우디아라비아 등 시장 점유율이 1위인 나라를 비롯해 브랜드 인지도가 높은 나라를 거점으로 시장을 확대하는 전략을 마련해 놓고 있다. 특히 해외시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세개 더」세탁기를 수출주력상품으로 육성키로 하고 판매망의 확충과 함께 브랜드 마케팅을 강화하고 있다. 또 세계 어느 시장에도 먹혀들어갈 수 있는 글로벌한 전자동 세탁기의 개발에도 온힘을 기울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채상성이 떨어지는 2조식 세탁기를 해외로 이전하는 등 생산 구조를 조정하면서 올 하반기를 시작으로 해외 세탁기 시장에 대한 본격 공략에 나설 계획이다. 신흥 시장에 대해서는 전자동 세탁기를 전면에 내세워 공략하고 유럽과 일본 등 선진시장의 경우 드럼식 세탁기로 고급 브랜드 이미지를 심는 데 주력키로 했다. 특히 유럽 등 선진시장의 경우 브랜드 지명도를 높이기 위해 전문 고급매장을 적극 개척하는 한편 최고 가격정책을 펼칠 계획으로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세탁기업체들은 늘어나는 해외 생산기지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현지 완결형의 경영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권역별로 마련한 조달사무소(IPO)를 통해 현지 부품과 원자재를 조달하는 방안을 강구중이다. 또 현지 특성에 맞는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해외시장용 제품의 연구개발과 디자인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본사에서 하고 있는 연구, 개발과 디자인도 현지 공장으로 이관한다는 계획이다.

시장 전략의 무게 중심이 해외시장으로 옮겨지면서 업체들의 제품 개발전략도 이전과 사뭇 달라지고 있다.

90년대 전반기만 해도 국내 세탁기 업체의 설계자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선진 업체가 개발한 최신 제품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오히려 일본 업체의 설계자들이 국내 업체를 방문한다. 신제품 정보를 얻기 위해서다. 그만큼 국내에서 세탁기 기술이 세계 정상급 수준에 올라섰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세탁기업체들은 특히 장기간 쓸 수 있는 독자 기술의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LG전자는 「전매 특허」로 내세운 통돌이 기술을 앞으로 당분간 유지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새 기술을 개발하기보다는 기존 기술을 더욱 보완해 발전시키는 데 주력키로 했다.

삼성전자와 대우전자도 각각 「손빨래」와 「공기방울」세탁기의 기술을 확대 발전시킨다는 전략이며 동양매직도 세탁봉기술에 대한 보완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는 독자 개발한 드럼 세탁기에 채용한 자동균형 기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해외 시장 공략의 선봉으로 내세울 방침이다.

세탁기업체들은 또 세계시장에서의 다양한 상품 수요에 대응하며 원가를 절감할 수 있는 제조 기술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핵심 부품과 외관 등에 따라 다양한 하위 모델을 조합해 만드는 모듈설계 기법이 각광받고 있다. LG전자는 수출 모델의 경우 최대 60개까지 하위 모델을 만들 수 있는 모듈설계기법을 확보하고 세계 시장의 다양한 수요에 대응하고 있으며 삼성전자 등도 이 기법을 도입할 방침이다.

날로 강화되고 있는 환경규제에 대응한 제조기술의 확보도 새로운 현안으로 떠올랐다. 세탁기업체들은 최근 저마다 전담팀을 구성해 세제와 물을 적게 쓰는 세탁기를 개발하고 있다.

세탁기업체들이 해외 시장에 눈을 돌리는 것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른 가전품목에 비하면 세탁기의 해외생산은 아직 소규모지만 국내 생산기반이 약화될 것에 대한 우려가 높다. 현재 세탁기의 해외 생산은 채산성이 낮은 2조식 세탁기와 저가형 전자동 세탁기가 주종이지만 앞으로는 고급형 전자동 세탁기도 해외로 이전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드럼세탁기를 앞세워 점차 국내 유입이 늘어나고 있는 외산 세탁기의 공세에 휘말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세탁기업체들은 부가가치가 높은 고급형 제품은 국내에서 계속 생산해 외산 제품에 시장을 내주지 않겠다고 밝혔다.

또 해외 공장을 안정화시키고 제품력에 걸맞은 마케팅 능력과 브랜드 지명도를 확보해야 하는 것은 큰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올초 동구지역에서 가동에 들어간 한 업체의 세탁기공장은 진입 시점이 너무 빨라 공장 운영에 애로를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공장은 2조식 세탁기를 생산하고 있는데 생산 노하우가 없어 대부분 제품의 품질 수준이 낮아 판매난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 업체는 전자동 세탁기 생산으로 전환할 방침인데 현지 수요가 일지 않자 현재 생산한 제품을 저가로 판매할 수밖에 없어 상당한 손해를 입고 있다.

이 업체의 한 관계자는 다른 업체의 공장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더욱이 국산 세탁기는 해외 시장에서 일본과 유럽의 현지 업체들에게 브랜드 지명도가 뒤져 고급 시장으로 좀처럼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문제점들에 대한 대안을 갖지 않고 펼치는 세탁기 사업구조의 조정은 사상누각에 불과할 것이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그렇지만 내수 시장의 침체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해외 시장에 역점을 둔 세탁기업계의 사업구조 조정은 앞으로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신화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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