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호 실장은 맨홀에서 솟구치고 있을 불길을 떠올리며 봉수통신에 대한 생각을 계속했다.
고려를 침략한 원의 지배세력이 차츰 후퇴할 무렵 점령지 통치의 안정과 통치범위의 확대를 위해 흡수되었던 고려의 봉수통신제도는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다시 강화되었다. 이때에는 왜구의 침입을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2거수 방식을 채택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의 봉수통신제도는 고려 말에 재정비된 봉수통신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계속되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의 지배층은 왕조 안정의 한 과정으로써 봉수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하여 고려 때보다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봉수통신제도를 확립하였다. 봉화거수를 새롭게 정하고, 전국 각지의 봉수대를 신축하는 한편 관계법령도 보완하여 한층더 자세한 부분까지 규정, 봉수통신을 제도적으로 확립시켰다.
봉수의 종류로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서울 목멱산(木覓山:지금의 남산)의 중앙봉수와 국경선이나 변경에 위치한 연변봉수가 있었는데, 연변봉수는 통신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국경초소나 수비대 구실도 겸하였다. 또한 수적으로는 가장 많았던 내지봉수가 있어 중앙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중계봉수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통신내용을 인근의 주민과 관청으로 전달하는 효과를 겸하기도 하였다.
봉수통신에서 봉화는 평상시 하루 한 번씩 일정한 시간에 수행되어 각 봉수에서 거화하는 시간과 서울에 도착하는 시간이 일정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만일 변란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수시로 상황에 따라 봉화를 올렸는데, 전국 어느 곳에서 보낸 봉화든 12시간 이내에 서울에 도착하도록 되어 있었다. 봉화에 의하여 서울로 전달된 소식은 병조에서 사람을 배치하여 목멱산 정상에 위치한 봉수를 간망, 무사할 경우에는 그 다음 날 아침에 승정원에 전하여 국왕에게 보고하고 변란 발생 때에는 밤중에라도 곧바로 승정원에 보고되었다.
봉수통신의 관장은 병조의 무비사가 수행하였고 지방의 경우에는 관찰사, 병사, 수사 등 모든 군사책임자가 그 임무를 맡았다. 만일 봉화 신호를 제때에 보내지 않거나 중단되는 사고가 발생하면 해당 봉수군은 물론 관할구역 전체가 연대책임을 졌다. 봉수 중단 등으로 아군이 미처 대비하지 못하여 성을 빼앗겼을 경우에는 참수를 행하는 등, 엄격한 벌칙이 시행되었다.
오피니언 많이 본 뉴스
-
1
네이버멤버십 플러스 가입자, 넷플릭스 무료로 본다
-
2
KT 28일 인사·조직개편 유력…슬림화로 AI 시장대응속도 강화
-
3
인텔, 美 반도체 보조금 78.6억달러 확정
-
4
갤럭시S25 울트라, 제품 영상 유출?… “어떻게 생겼나”
-
5
K조선 새 먹거리 '美 해군 MRO'
-
6
삼성전자 사장 승진자는 누구?
-
7
美 캘리포니아 등 6개주, 내년부터 '전기차 판매 의무화'
-
8
한국은행 디지털화폐(CBDC) 결제 첫 공개…“앱 하나로 3초면 끝나”
-
9
교육부 “연세대 논술 초과모집 인원, 2년후 입시에서 감축”
-
10
오픈소스 명가 오픈소스컨설팅, 비용·업무 최적화 '플레이스 클라우드' 각광
브랜드 뉴스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