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도입 승인기준이 마련되다
1967년 경제기획원에 「IBM 1401」이 도입된 이래 80년대 말까지 우리나라에 설치된 거의 모든 컴퓨터는 정부의 승인이 있어야만 도입(수입)이 가능했다.
정보산업을 총괄하고 있던 과학기술처는 80년 11월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컴퓨터 도입기준을 마련하는데 이것이 바로 「전자계산조직 도입승인 기준」이다. 이 기준을 토대로 정부는 과기처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전자계산조직도입심의위원회를 정기적으로 열어 기업(또는 기관)이 신청한 컴퓨터도입신청서를 심의 도입승인 여부를 결정했다.
지금은 아무런 쓸모가 없어졌지만 이 도입 기준은 국내 컴퓨터 산업 발전과 정보화 촉진 과정에 상당한 관계와 의미를 갖고 있었다. 국내에서 필요한컴퓨터의 99%를 외국에서 수입해 오던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컴퓨터 산업의 발전이나 정보화의 시작이 이 도입기준에서부터 비롯됐다는 말이 나올법도 했다. 공급자(수입판매자)와 수요자(사용자)간 의무와 역할까지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도입기준이 우리나라 정보산업 발전 방향을 제시한최초의 母法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을 정도다.
실제 컴퓨터 도입 기준은 별다른 정보산업 관련 법규가 없었던 상황에서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업 전산화의 촉진제 역할을 해냈고 컴퓨터 업계 측면에서도 기업 생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80년대 과기처 공보실이 수행했던 업무 가운데 하나는 도입기준에 따라 컴퓨터 도입 승인을 얻은 기업(수요자)과 도입기종 리스트를 언론에 발표하는것이었다.
발표 주기는 처음에는 반기별로 하다 분기별로 이어졌고 나중에는 매달로회수를 눌려나갔다. 이렇게 발표된 리스트는 업계에서 큰 뉴스거리가 됐다.
경쟁기업들은 도입 컴퓨터 기종의 규모나 사양으로 미루어 상대 기업의 경영전략을 짐작할 수 있었고 해당 기업 측에서는 컴퓨터 도입 그 자체만으로 기업의 위상을 대내 외에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컴퓨터 도입 심의는 67년 과기처 출범과 함께 마련된 「전자계산기사용 개발 7개년 계획」에 따라 같은 해 9월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원회를설치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이때의 심의는 당시 우리나라의 컴퓨터 총 도입 대수가 2~3대에 불과했고 소프트웨어 용역 등 컴퓨터 기본 운영 환경을 받쳐주는 분야가 전무했다는 점에서 수요자의 무분별한 컴퓨터 도입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다분했었다.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원회의 결정에 따른 실무나 조정 역할은 초기에는과학기술처 진흥국이 맡았다. 컴퓨터 관련 정책업무가 점차 확대되기 시작한71년부터는 컴퓨터 산업을 제도적으로 뒤바침하기 위해 조직된 정보관리실이주관했다. 정보관리실은 75년 정보산업국으로 확대 개편되는데 이곳에서 79년 9월에 마련한 것이 바로 「전자계산조직 도입 심의 기준」이다. 이 기준은 컴퓨터도입 심의를 처음으로 문건화 한 것으로 의미가 있다. 이전까지의도입 심의는 어떤 기준이 없이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79년 기준은 76년 이후 급증하기 시작한 컴퓨터 도입 수요에 효율적으로대처한다는 목표에 의해 마련됐다. 실제 73년의 경우 한해 동안 도입된 컴퓨터 대수가 12대에 불과하던 것이 75년 22대,77년 50대, 79년 1백72대 등으로급증하기 시작했다. 기업과 기관의 컴퓨터 도입 신청이 급증하자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원회는 79년 들어서부터는 이틀에 1대꼴로 도입 심의를 해야할지경에 이르게 됐다. 결국 과기처는 도입 심의에 대한 일종의 가이드 라인의필요성을 느꼈고 이렇게 해서 「전자계산조직 도입심의 기준」이 마련됐던것이다.
79년 기준은 크게 3가지 항목으로 구성돼 있는데 컴퓨터를 판매하려는 공급자(수입자)에 대한 자격 요건을 규정한 「기본지침」, 컴퓨터를 도입해서사용하려는 수요자 측의 「수용태세」, 도입 후 공급자가 수요자에게 기술공여 등을 권장하는 「경과조치」 등 이었다.
그러나 이 기준은 도입 심의 가이드 라인으로서 기능은 그런대로 쓸 만했지만 규정이나 내용이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포괄적이어서 시대 상황에 적합하지 못했다. 67년의 경우에서 처럼 컴퓨터 도입을 적극 권장하기보다는 통제 성격이 강해 산업적 측면에서 악법의 소지가 다분했다는 점과 각각의 규정이나 조항의 의미도 애매하다는 점 등이 주된 지적 사항이었다. 예컨대 『중형급 이상 컴퓨터 도입은 과기처 장관이 인정하는 컴퓨터 국산화 또는 전자산업 발전에 기술기여도가 높은 공급업체에 공급 우선권을 부여한다』라거나 『업무의 내용·성격 및 기타 사항으로 보아 전산화가 절실히 요구되고있는지의 여부를 따진다』라는 조항들이 그 단적인 예였다.
80년 11월에 마련된 「전자계산 도입 승인 기준」은 79년 기준에서 나타난문제점을 해결하고 보완하기 위한 성격이 강했다. 이 기준에는 문건 규모가표준 문서 용지로 5장이 넘었을 만큼 매우 구체적인 규정과 내용들이 담겨있었다.
80년 기준은 공급자의 요건 구비 도입금지 대상 공급자와 사용자간 계약사용자의 요건구비 등 크게 4가지로 돼 있었는데 모든 규정이 79년 기준과달리 객관적인 수치로 구체화 돼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우선 공급자는 공급기종 유형별로 일정한 숫자의 엔지니어들을 보유해야 하고 일정한 양의 유지보수용 부품을 구비하고 있어야 했다. 또 고장 등 비상시를 대비한 백업용기종과 유지보수 체제를 반드시 갖추도록 의무화 했다.
도입금지 기종으로는 발표시기를 기준으로 임대차의 경는 5년 이상, 직접구입시는 3년 이상된 기종을 대상으로 했다. 이미 업그레이드 됐거나 대체기종이 발표된 제품도 금지 대상에 포함시켰다. 정부의 표준화 방침에 부합하지 못하는 기종도 마찬가지였다.
계약규정에서는 공급가격 및 유지보수 비용규정 원칙과 예외 조항이 명시돼 있고 사용자의 요건 구비항목에서도 도입 사전준비, 개발요원 확보, 전산실 설치 등 전담조직기구 마련 요건이 객관적인 수치로 규정돼 있다. 이처럼도입 기준을 구체적으로 적시해 놓은 것은 공급자나 수요자가 이를테면 객관적인 조건만 갖추고 있으면 언제든지 컴퓨터 도입을 승인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과기처에서 80년 기준안 마련에 참여했던 Q씨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79년 기준은 지나치게 형식적이었던 데다 심의 과정에서도 주관적 심의의 소지가 다분했었지요. 80년 기준은 신청한 사용자 기관에 관계 없이 조건만 갖추면 도입이 가능토록 하는 일종의 자동승인 체제를 기반으로 작성됐습니다. 심의위원회의 심의 기능을 대폭 축소했다고나 할까요. 한마디로 국내외 적으로 대세가 돼버린 컴퓨터 도입을 정부가 일일히 통제할 수는 없다고본거죠. 또 심의에 몇 달씩 소요돼 전산화 일정에 차질을 빚기가 일쑤였던도입 기업과 기관들이 크게 환영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실제 과기처는 80년 기준 마련에 앞서 향후 국내 컴퓨터 설치 예상치를 조사했는데 80년 6월말 현재 총 누적대수가 4백75대이던 것이 83년에는 한해에만 4백20대, 86년에는 6백7대가 각각 도입될 것으로 분석돼 있었다. 이와는별도로 판매가격(FOB)기준 10만 달러 미만인 미니컴퓨터와 마이크로컴퓨터도83년 1천7백70대, 86년 5천7백여대가 각각 도입될 전망이었다.
과기처로서는 79년 기준 마련 당시와는 엄청나게 달라지고 있는 산업환경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기처가 80년 기준을 마련한 이면에는 이같은 산업환경의 변화 요인 외에 더 복잡한 사연이 있었다. 기준안 마련에 참여했던 다른 Q씨의 회고.
『80년 기준 마련은 상공부의 전자공업진흥법 개정 방침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상공부는 향후 전자공업의 발전이 컴퓨터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여론을 등에 없고 「전자계산조직을 전자공업의 범위 안에 포함한다」라는 조문을 81년 개정 예정인 전자공업진흥법에 추가시킨다는 방침을 정해 놓고 있었죠.(본란 제16회 「상공부의 부상...」참조) 과기처로서는정보산업 영역 관할권 고수를 놓고 상공부와 정면 대결이 불가피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앞서 79년에는 전경련이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컴퓨터 수입 제한을 완화해 줄 것을 정부 측에 요청(본란 제22회 「전경련의 보고서와 과기처」참조)하던 터여서 과기처로서는 사면초가의 압력직면해 있었지요.』
Q씨의 말대로라면 과기처의 81년 도입기준 마련은 경쟁부처의 경쟁의식이나 여론의 압력을 피해 정보산업 관할권을 지키려는 고육책이었던 측면이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해서든 정보산업 분야 母法 격인 컴퓨터도입기준과 도입 심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했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 과기처는 결국 전자계산조직도입심의위원회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내용의 80년기준을 마련한 셈이다.
<서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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