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약기 (1)
지금도 그렇지만 70년대 우리나라 컴퓨터산업 환경에서 가장 취약한 부문은 역시 고급 인력의 부족이었다.
한 연구조사에 따르면 75년말 우리나라 컴퓨터 설치대수는 1백22대로 여기에 필요한 기술 및 운영 요원은 6천2백여명이었으나 약 4천3백여명만이 확보돼 있어 인력 충원율은 70%를 밑돌고 있었다.(76과학기술편람)
과기처는 76년 연두 업무보고에서 컴퓨터 요원을 포함한 고급 기술요원의중장기 양성 계획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등 인력수급에 매우 고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0년 이후 정부의 장려로 기업 등에 컴퓨터 도입이 본격적으로 확대됐으나 시스템 운영이나 관리 요원 등의 확보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결과이기도 하다.
76년 당시 국내에 확보된 4천3백여명의 컴퓨터 기술 및 운영요원 분포를보면 석박사급과 최정예 전문기술관리 요원 50여명,전공 및 관련 전공 학사급 2백여명 등 모두 2백50여명이 고급두되군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박사급은 미국과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30여명과 국내에서 경영정보시스템 등을 전공한 국내파 20여명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주로 KIST등 연구용역기관에 포진하고 있었다.
2백여명의 학사급 고급두뇌로는 76년도를 전후해서 첫 졸업생을 내기 시작한 국내 5개 대학의 전자계산학과 출신 1백여명과 수학·통계·전자·통신등 관련학과 전공 출신 1백여명 등이다. 학사급은 주로 정부기관·기업체 전산실과 KIST 등 용역연구기관, IBM·후지쓰·한국스페리(현 유니시스)·컨트롤데이터코리아(CDK) 등 컴퓨터 공급회사 등에서 시스템엔지니어(SE)고객지원요원(CE), 전문 프로그래머 등으로 현업의 핵심부서에 배치돼 있었다.
고급요원을 제외한 4천여명 가운데는 KIST·정부전자계산소(GCC)를 비롯,서울컴퓨터센터·한국전자계산 등 용역기관들이 소정의 단기 교육을 양성된요원들이 많았다. 또 한국 IBM·한국스페리 등 컴퓨터 회사들이 컴퓨터 도입기관의 직원들을 재교육시켜 배출한 요원들도 부지기 수였다. 도입기관의 직원 재교육은 컴퓨터의 간단한 조작이나 감시인력의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70년대 중반까지 컴퓨터를 가장 많이 판매했던 한국IBM의 경우 76년 말까지재교육 실적은 연인원 3천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한 사람이 여러 과정을 수강한 경우가 대부분 이었으므로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적었음)
4천여명 요원 가운데는 또 1천5백여명 정도가 고졸 출신 카드천공요원(키펀처)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76년말 현재 국내 카드천공기 및 검공기도입실적은 1천2백여대에 이름)
단기간의 재교육과 재배치를 통해 양성된 인력이나 단순직인 키펀처들을기술 및 운영요원에 분류할 수 있었던 시대적 상황이 매우 흥미롭다. 하지만당시의 컴퓨터에 대한 사회적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다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직원 재교육이나 키펀처의 양성은 그리 어려운 일이 못됐다. 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인력 충원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키펀처들은 75년을 기점으로 키펀치용역 수출업계가 사양세를 걸으면서 오히려 줄여 나가야 할 판이었다. 당시 정부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76년말 시점에서 부족한 컴퓨터 기술 및 운영요원 1천9백여명의 대부분도기술관리요원·SE·CE·프로그래머 등 장기간 교육에 의해서만 양성되는 고급인력일 터였다. 그런데 이같은 전문 인력부족 현상은 정부 차원의 근본적대책 마련 없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심화될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당시로서 4년제 정규대학 컴퓨터관련 학과 전공 전문인력 부족현상은 컴퓨터 도입확대와 정보화 시대를 앞두고 정부가 해결해야 줘야 할 최우선 과제의 하나이기도 했다.
76년 한해 우리나라에서 배출된 4년제 정규대학 전자계산학과 졸업생은 모두 1백1명이었다. 이해 첫 졸업생을 배출한 광운대·중앙대·동국대·홍익대등 4개 대학과 3회째 졸업생을 낸 숭실대 등 5개 대학 5개 학과를 합친 숫자였다. 1백명 이상의 컴퓨터전공 학사가 배출된 것은 현실적인 고급인력 부족을 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지만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던데정부의 공급인력 양성 정책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일대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4년제 과정의 컴퓨터관련 학과가 설치된 것은 70년초 숭실대(당시 숭전대)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숭실대는 70년 3월 金淇龍 교수를 통해 당시 미국 대학들이 채택하고 있는 이른바 「커리큘럼69」를 토대로 전자계산학과를 설치, 30여명의 신입생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숭실대 전자계산학과가 첫 신입생을 받아 들이는 시점인 70년초 컴퓨터도입의 급증으로 1개과 만으로는 기술인력 확보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해진상황이 되고 말았다.
컴퓨터 도입을 심의하는 과기처의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원회에 접수된자료대로라면 70년 이후 컴퓨터 도입은 연평균 25% 이상씩 기하급수로 증가할 전망이었다. 그러나 숭실대 전자계산학과가 74년에 배출하게 될 첫 졸업생은 군입대 등을 제외하면 많아야 20명 선이었다.
이같은 예측에 따라 과기처와 문교부는 신입생도 받기전 다른 대학들로 하여금 전자계산학과의 추가신설을 협의하게 된 것이다. 이 협의에 의해 72년3월 광운대(당시 광운공과대학)·중앙대·동국대·홍익대 등 4개 대학이 동시에 전자계산학과를 신설하게 됐던 것이다.
77학번 신입생을 선발하기 직전인 76년말 5개의 대학의 전자계산학과현황을 살펴보면 60년대말 도입기, 70년대 중반까지 적응기를 거쳐 비로소 도약기로 접어든 우리나라 컴퓨터 환경을 적나라하게 읽을 수 있어 흥미롭다.
과기처 자료에 따르면 74년도 숭실대 1회 졸업생 22명부터 76년도 5개대학1회 졸업생을 모두 포함한 4년제 전자계산학과 출신 전문 졸업생은 1백55명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재미있는 것은 76년 현재 졸업생 1백55명 가운데 군입대를 포함한 취업률이 83.2%(1백29명)에 이르러 당시 4년제 일반학과의 졸업생 평균 취업률 70%대를 상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기관별 취업 현황을 보면 정부기관(25)·금융기관(9)·컴퓨터회사(10)·연구소(5)·기업체(26)·교육기관(12)·대학원 진학(9)·군입대(33)등이었다.
나머지 미취업자 26명은 결혼(여학생)이나 타직종 취업 등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전자계산학과 재학생 및 졸업생들로부터 인긱 높았던 취직 기관으로는KIST·한국은행·5개 대학부설 전자계산소·포항제철·육군전산소·한국IBM·쌍용·파콤코리아(현 한국후지쓰)·서울시청·경제기획원 통계국 등이었던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각 대학의 4개년 학과 과정은 앞서 언급한 미국의 「커리큘럼xx」을 따른것이었는데 1학년은 교양과목 위주였고 2학년은 코볼과 포트란 등 프로그램언어·계산기 실습·어셈블리어·회로이론·선형대수 등, 3학년은 수치해석·데이터 구조·계산기 구조·운용체제(OS)·계산기실습·확률과 통계·계산기언어론·계산기 회로·회로망 등, 4학년은 경영정보시스템(MIS)·PL/1·시뮬레이션·아날로그/하이브리드·운용과학(OR)·정보이론 등이다. 현재의 전자계산학과 과정과 비교해서 내용상으론 달라졌겠지만 과목상으로는 크게 변화된 것은 없다.
당시 대학 교수진들로는 광운대의 경우 주임교수였던 沈在洪을 필두로 李圭鎔·金慶泰 등이 포진하고 있었고 중앙대에는 주임교수 李京煥을 비롯 金永燦 등이, 홍익대에는 70년 숭실대 전자계산학과 창설 주역이던 金淇龍을위시하여 주임교수 朴長春·元裕鉉 등이 있었다. 또 동국대에는 주임교수 安思明을 비롯 洪永植·朴忠吉·丁奎連 등이, 숭실대에는 주임교수 李哲熙를위시하여 宋厚奉·辛洪哲과 미국인 프린스 등이 재직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실습은 부설 전자계산소가 큰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각대학의전자계산소들은 학사와 및 행정업무 처리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학생들이 실습할 수 있도록 문을 개방해 놓고 있었다.
5개 대학 전자계산소들이 보유하고 있던 장비들 가운데는 컨트롤데이터의「CDC 3100」 을 보유하고 있던 홍익대, 후지쓰의 「파콤230-15」를 보유하고 있던 광운대가 용량면에서 다른 대학들을 앞섰다. 중앙대·동국대·숭실대가 보유하고 있던 기종은 IBM의 「IBM 1130」이었다. 그러나 이들 5개 대학 전자계산소가 보유하고 있던 기종들은 세대 구분상으로 본다면 60년대 초반에 나온 2세대 중형급 컴퓨터들이었다.
기업이나 기관들에서는 이미 70년대 초반부터 IBM의 「시스템/360」과 「시스템/370」을 비롯 컨트롤데이터의 「사이버72」 등 대형에서 초대형급 3세대 기종 도입이 한창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대학의 컴퓨터 시설은 당시로서도 상당히 낙후된 상황이었던 셈이다.
한편 4년제 대학의 전자계산학과 신설은 79년까지 서울대·고려대·연세대등이 가세 15개교로 늘었고 이때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하는 해인 83년에는졸업생 규모가 6백명 선을 넘게 된다.
<서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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