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기획원 예산업무와 최초의 데이터통신
컴퓨터 도입이 시작된 60년대 말이 컴퓨터에 대한 경외심을 자아내게 한시대였다면 70년대 초는 컴퓨터 활용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킨 시대가 된다.
그 촉매는 데이터통신이었다.
데이터통신은 21세기가 불과 몇 년 앞으로 다가선 오늘날 매우 복잡다양한네트워크 구조로 고도화 되면서 컴퓨터환경에서 없어서는 안될 요소가 됐다.
정보고속도로의 건설과 인터네트의 확산붐이 그렇다. 무궁화호 같은 상업용위성의 발사가 사람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것도 데이터통신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바로 이같은 현상을 미리 예견이나 한 듯 우리나라에서도 70년대 초부터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데이터통신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컴퓨터의 데이터통신이 이루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25년전이다. 70년 6월 경제기획원 예산국(현 재정경제원 예산실)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 (KIST, 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전자계산실 간의 통신이 바로그효시이다.
국내 최대 용량이었던 KIST전산실(홍릉소재)의 대형컴퓨터 "CDC 3300"과경제기획원 예산국(광화문소재)의 배치터미널(Batch Terminal) "CDC 200 UT"가 체신부(현 정보통신부)의 전용선과 모뎀 장비에 의해 접속됐던 것이다.
사실 70년대 초반까지도 우리나라의 컴퓨터 작동 공간과 컴퓨팅 파워의 공유는 극도로 제한된 장소, 즉 전산실 안에서만 가능했다. 프로그램을 입력해서처리한 결과를 터미널을 통해 받아볼 수 있는 장소는 대형컴퓨터(호스트)가함께 설치돼 있는 전산실내부 뿐이었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호스트의 정보를 지역적으로 다른 곳의 터미널에서 받아볼수있게 된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즉 네트워크를 통해 원격지의 컴퓨터를 공유하는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던 셈이다.
이때 KIST전산실은 경제기획원으로부터 국가 예산업무의 전산화(당시 용어로EDPS)요청을 의뢰받은 상황이었다. 최초의 정부기관 용역이기도 했던 이프로젝트는 KIST전산실 연구원 안문석(현 고려대교수)의 "예산업무의 EDPS화에관한 연구"결과를 토대로 진행됐다.
주요 내용은 기획원이 KIST전산실의 컴퓨팅 파워를 공유함으로써 예산사정시예산당국이 필요로 하는 정책자료의 온라인 출력, 국회예결을 거친 예산의집행과 결산 등을 자동으로 처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개발이었다. 터미널설치는 이 프로젝트를 진행시키는 핵심사업단계 가운데 하나였다. "CDC 200UT"터미널은 KIST의 예산업무 EDPS 결과를 예산국이 온라인으로 받아볼 수있도록 해 주는 도구였다.
이때 예산업무 EDPS주역들은 KIST전산실 측에서 성기수(현 동명정보대 총장)와 안문석, 경제기획원 측에서는 예산총괄과장 강경식(현 신한국당 의원)등이었다. 이 가운데 특히 컴퓨터 비전문가였던 강경식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시라큐스대 행정학석사였던 강경식은 69년 예산총괄과장이 되면서부터김학열부총리 겸 기획원장관(작고)에게 예산업무 전산화를 강력하게 건의하기시작했고 마침내 김부총리는 70년 4월 7일 경제동향 브리핑을 통해 박정희대통령에게 예산업무 전산화계획을 정식 보고하게 된다.
이때 브리핑을 위해 KIST 관계자들을 빈번하게 면담했던 김학열부총리가경제장관 회의때마다 "장관들, 컴퓨터공부 좀 하세요!"라고 한 말은 지금도관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에피소드이다. 김부총리의 이같은 지시(?)때문에 경제장관들이 70년과 71년 사이에 홍릉을 자주 찾게 됐고 이때마다 KIST 전체가 장관행차에 대응하느라 분주했던 장면들이 당시 사진자료들을 통해 보여지고 있다.
기획원 예산국에 설치된 "CDC 200 UT" 배치터미널은 분당 3백장를 읽을수있는 카드판독기(card reader), 분당 3백줄(line)을 인쇄할 수 있는 라인프린터, 운영자(operator)용 디스플레이 콘솔(console) 등으로 구성돼 있으나호스트처럼 자체처리능력은 없는 더미(dummy)방식이었다. 여기에 미 릭슨(Ri.on)사로부터 수입해온 전송속도 3백bps급의 모뎀 "릭슨 PM 24A"가 통신장비로 사용됐다.
터미널과 모뎀의 설치에 앞서 KIST전산실은 IBM에 데이터통신 환경 및 타당성조사를 의뢰했는데 체신부의 전용선 상태가 불량, 통신이 불가능할 것이란조사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강경식은 이 결과를 무시했다. 오히려 KIST측의작업강행을 독려, 국내 첫 데이터통신 개통의 주역이 됐던 것이다.
터미널 개통식이 있은 70년 6월21일 강경식은 터미널이 무병장수하고 만사형통(?)하라고 그 앞에서 돼지머리를 준비하고 고사를 지냈는데 다음날 한신문에서는 "최첨단 만능 콤퓨터 앞에서 고사를 지냈다"며 비아냥거리는 가십기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기획원 예산국의 터미널과 모뎀 설치가 사회적으로얼마나 큰 관심을 보였는가를 역으로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CDC200 UT"와 "릭슨 PM 24A" 콤비는 이어서 국내 처음으로 "주판알 없는상업학교 교육"을 표방한 덕수상고(71년12월)를 비롯 중앙관상대(70년 11월, 현 기상청), 농림부 양정국(70년12월), 전매청(71년10월, 현 담배인삼공사) 등에도 도입 설치돼 KIST 전산실과 연결, 초창기 우리나라 데이터통신시대를 주도해 나갔다.
한편 예산국에 도입된 "릭슨 PM 24A"는 국내 최초로 도입된 데이터통신용모뎀으로 기록되고 있다. "릭슨 PM 24A"에 대한 관심은 특히 훗날 KIST전산실 내에 데이터통신그룹이 조직되는 계기를 마련해 줬고 최초의 국산 모뎀시제품 개발의 초석이 됐다.
73년 봄에 조직된 KIST전산실의 데이터통신그룹은 원격지에서 온라인터미널을 접속해서 대용량 호스트컴퓨터 서비스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당시 KIST전산실 호스트는 초대형 컴퓨터 "사이버(Cyber)72"기종으로 바뀌어 있었고 김동규(현 아주대 교수).정진욱(현포항공대 교수).한기영(현 재미실업가) 등이 초창기 멤버로 참여했다. 이 가운데 김동규는 국내 최초의 데이터통신분야 박사학위(미캔자스주립대) 소지자였다.
이어서 후배그룹으로 박희원.남석우 등이 가세하게 되면서 74년 3백bps급의국산 모뎀 시제품을 완성하게 된다. 이 모뎀 시제품 경험이 바로 오늘날국산 데이터통신장비업계 쌍두마차인 콤텍시스템과 데이타콤을 잉태시키는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데이터통신그룹이 주력했던 분야는 모뎀 시제품의 제작보다는터미널 보급이었다. 이에 따라 이기식(현 대우증권 부사장).김동규.정진욱.
박찬성(현 시스템공학센터 통신운영실장) 등이 중심이 된 별도의 터미널팀이만들어 지게 된다.
데이터통신의 핵심장비인 터미널은 크게 배치터미널과 대화형(Interactive)터미널로 구분돼 있었다. 배치터미널은 앞서 설명했던 "CDC 200 UT"와 같은구성을 하고 있고 경제기획원 등 작업량이 많은 기관에 주로 설치가 됐다.
반면 작업량은 많지 않지만 업무처리가 대화형일 경우 텔레타이프(Tele Type)와 CRT디스플레이로 구성되는 대화형 터미널이 사용됐다. 94년 KIST전산실의 "사이버72"와 전남 송정리의 삼양타이어공장의 4백km 사이에 설치된 최초의 장거리 데이터통신도 "M 38"라는 대화형 텔레타이프 터미널에 의해서였다. 삼양타이어의 터미널 설치는 초장거리(?)였던데다 국내처음으로 4천8백bps 속도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KIST전산실과 기획원 예산국간 터미널 설치 이상의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이때 정부 부처 중에서는 유일하게 과학기술처 내 장관실 옆에 이 텔레타이프 한대가 설치돼 있었는데 이 터미널에 대한 에피소드는 오늘날 듣는 이로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해주고 있다. 어느 해인가 과기처 연두순시를 나선박정희대통령은 이 터미널을 보며 "우리나라에 소와 닭이 몇 마리나 되는가"라고 물었고 이 터미널은 즉석에서 끝자릿수까지 자세하게 답하는 위력(?)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대다수의 텔레타이프 터미널 또는 배치터미널들은 각종장애로 고장을 일으키는 일이 잦아 관계자들을 골탕먹이는 일이 많았다.
특히 각종 행사 때 운영자들이 터미널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참석한 기관장또는 사장의 얼굴이나 "축 환영"과 같은 글자를 코딩해 라인프린터를 통해찍어내곤 했는데 하필 그때마다 고장을 일으켜 보는 이들을 민망케 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당시 터미널의 장애는 회선불량과 함께 전화국 직원들의 데이터통신이나모뎀에 대한 이해부족이 가장 큰 이유였다. 예컨대 통신회선의 점검 같은 작업들이 음성통신에만 의지하여 치러지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70년대 초가 사람들에게 컴퓨터 활용에 대한 환상을 불러 일으켜 준시대가 된 것은 바로 이같은 장애요인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약컴퓨터가 모든 일을 장애없이 척척 처리해 줬다면 사람들은 컴퓨터에 대한환상은 그만큼 줄어들었을 터이다. 환상은 그것이 불가능하게 보일수록 강렬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70년대의 한때를 풍미했던 컴퓨터 앞에서의돼지머리 고사는 모든 장애귀신(?)들을 쫓고자 하는 가장 합리적인 축원의방법이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서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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