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신정 연휴인 1월3일 전두환 대통령은 김재익 오명 홍성원 등 경제 비서관을 불러놓고 다음과 같은 전혀 예상치 못한 지시를 내렸다.
"우리나라의 웬만한 고지에는 통신이나 방송 중계시설이 있는데, 아주 무 원칙하게 설치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신정 연휴에 잠을 안자며 생각해봤는데 인력관리나 경제성 등 어느 면에서 따져 보아도 그렇게 관리해 서는 안될 일인 것 같아요. 따라서 경제비서실이 체신부와 협조해서 고지대 마이크로웨이브중계소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하루속히 대책을 강구 하여 시행하고, 그 결과를 보고해주기 바랍니다" 이러한 전대통령의 지시는 틈이 날 때마다 계속되었다. 즉, 1981년 2월13 일의 국무회의와 동년 5월1일의 체신부 업무보고시에도 "고지대 마이크로웨 이브중계소의 경우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각 부처에서 별도의 중계소 를운영하고 있어 예산.인력 등 여러 측면에서 낭비가 많으므로 기간통신망을 통합하여 운영하는 방안을 강력하게 추진하라"는 지시가 이어졌다.
그 무렵 전국의 산꼭대기에는 군데군데 높은 철탑이 솟아 있으며, 그 철탑 에는 갖가지 안테나가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초단파중계소라 불리는 이곳에는 철탑이 하나만 서 있는 게 아니고 몇개가 엉켜서 또는 여기저기 흩어져 서 있었다. 그러한 철탑 주변의 땅은 맨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보통이었으며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초단파중계소까지 도로가 뚫려 있어심각할 정도로 자연을 훼손했다.
철탑에 붙어 있는 안테나는 통신이나 방송용으로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매일 듣고 보는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전파는 주파수가 매우 높은 초단파(mic rowave)인데, 이 초단파의 특성은 직선으로 달리며, 또 달림에 따라 힘이 약해진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전파를 멀리 보내려면 중간에 장애물이 없어야하며 또 그 힘이 약해지기 전에 그것을 받아 다시 보낼 수 있는 중계소가 필요하다. 장거리를 달리자면 혼자의 힘으로는 어려우므로 중간중간에서 다음주자가 이어받아 달리는 릴레이 경주와 이치가 비슷하다.
초단파가 힘이 약해지지 않고 달릴 수 있는 거리는 50km 안팎. 따라서 50k m안팎의 지점에 이를 전해줄 수 있는 중계소가 필요하다. 흔히 초단파통신을 가리켜 가시거리통신이라 하는데, 이는 맑은 날에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까지 초단파가 전달된다는 뜻이다. 때문에 초단파중계소는 옛날의 봉수대와 비슷한 위치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왜 하나의 중계소에 여러개의 철탑이 필요할까?그 이유는 간단하다. 중계소를 운영하는 기관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 당시 전국에서 가장 많은 기관의 중계시설을 수용하고 있던 대구 부근의 팔공산을 예로 들면, 체신부 외에도 KBS, 한전, 육군 등 11개 기관이나 되었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볼때 이들 기관이 필요로하는 안테나는 모두 하나의 철탑에 수용할 수 있다. 다만 철탑의 크기를 어느 정도로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따름이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 한정된 전파지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것이고, 산꼭대기라는 비좁은 땅을 경제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며 또 자연경관을 살리는 길이다.
초단파중계소 등 국가기간통신망 통합이 본격적으로 검토된 것은 1980년 국보위 교체분과위원회에서였다. 이에 앞서 1975년 12월에는 박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서 각 부처가 따로따로 보유하고 있는 장거리통신망을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체신부의 통신망에 통합해야 한다는결론을 내렸고, 이에 따라 체신부는 관련기관과 수차례의 협의를 거쳐 장거 리통신망통합계획을 수립한 바 있다.
그런데 78년까지 실제로 통합된 것은 치안본부와 도청간을 연결하는 66회 선, 그리고 대검찰청의 본청과 지청을 연결하는 61회선의 마이크로웨이브 통신망에 불과했다. 한국전력이나 철도청,건설부의 통신망은 통합조건에 대한 이견때문에 통합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때 통신망 통합 문제가 국무회의에서 논의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느날 헬기를 타고 지방 순시를 하던 박대통령은 산봉우리마다 철탑 이서 있고, 그 주변의 자연이 적잖게 훼손되어 있는 것을 보고 눈살을 잔뜩찌푸렸다. 그는 수행하는 비서관에게 "왜 저렇게 같은 산에 안테나가 여기저 기솟아 있고 또 산이 벌겋게 파헤쳐져 있느냐.
각 기관마다 통신망을 따로따로구성해서 운영하다 보니까 저런 현상이 생기는 것 같은데, 체신부가 통합해서 운영한다면 안테나 하나만 세우면 될 것아니냐. 그렇게 하는 것이 예산이나 인력 절감 측면에서도 옳은 일이고 또 자연보호 측면에서도 좋은 일 아니냐. 기술적으로 검토해서 하나로 묶도록해라 하고 지시했다.
이러한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체신부는 관계 부처와 협의하여 장거리통 신망통합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남산타워 주변에 있는 철탑까지 철거할 계획 을세웠으나 소유주인 KBS에서 예비용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고 주장함에 따라 철거를 보류한 일이 있었다.
국보위 교체분과위원회에서 통신망 통합에 관한 아이디어를 내놓은 사람은위원장 이우재였다. 군 통신장교 시절부터 그 필요성을 절감했고 국방대학원 시절에는 그 제목으로 연구논문을 쓴 일이 있던 그는 통신망 통합계획을 만들어 전대통령에게 보고했다. 평소 통신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전대통령은 그 계획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대통령 자신도 그런 주장을 했어요. 그분은 공수부대 출신으로 산을 많이타서 웬만한 산은 거의 안돌아다닌 데가 없었어요. 그럴 때마다 마이크로 웨이브중계소 시설들을 보게 됐으니까 통신자원의 낭비, 인력.예산상의 낭비 가심하다는 것을 느꼈을 겁니다. 또 안보 측면에서도 취약성이 있다는 것을느끼고 있었구요. 초안은 체신부와 한전, 국방부의 시설을 통합하는데 초점 을두었고 전대통령도 같은 생각이어서 그렇게 추진하자고 했던 것인데 국보 위가 해산하는 바람에 결말을 못짓고 말았죠" 결국 그 계획서는 청와대 경제비서실 오명 비서관에게 넘겨졌다. 오비서관 은그 계획서를 검토한 다음 체신부에 보다 구체적인 통합계획을 수립해 달라 고요청하는 한편, 전대통령에게 마이크로웨이브중계소 시설 운영에 이러이러 한문제점이 있다고 넌지시 보고했다. 그러던 참인데 뜻밖에도 전대통령이 통신망 통합에 관한 강력한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전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오비서관은 관련 기관의 책임자들을 청와대로 불 러반응을 떠보았다. 그러자 검찰 경찰 국방부 등 권력기관의 참석자들은 극 히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통신 통합을 했다가 한 군데만 고장이 나도 전체 통신이 죽게 되는데 그 런일이 생겨서야 되겠습니까. 광주사태 때도 검찰 라인이 하나 살아 있었기때문에 통신이 가능했지, 안그랬으면 전혀 그 실상을 알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유사시에 대비해서라도 여러 기관의 통신망이 따로따로 운용되는 것이바람직합니다 특히 국방부는 "국방부 통신망은 특별하다"며 통신망 통합에 반대했다. 실무자들끼리 만났을 때 국방부 실무자들은 "통신이 두절돼서 전략상 차질이 생기면 누가 책임질 것이냐? 체신부가 책임질 수 있느냐?"며 윽박질렀고, 이에대해 체신부 실무자들은 "체신부가 운용한다고 해서 통신이 두절된다면 국방부가 운용한다고 해서 통신이 두절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것 아니냐.
국가통신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자연보호 차원에서 통합하자는 거다"라며 입씨름을 벌였다.
관련 기관의 반응이 어떻든 대통령의 지시사항은 이행되어야 했다. 오비서관은 우선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고지에 자리잡은 중계소 몇군데를 둘러보았다. 예상했던대로 중계소는 난립해 있었고 그 운영 역시 엉망이었다. 따라서 통신망 통합이 불가피함을 느끼고 그해 2월 각 부처가 참여하는 실무협의회 를 구성하여 구체적인 추진계획을 수립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체신부 차관으로 발령되었다. 그러니까 통신망 통합작업을 주관할 기관의 부책임자가 되었던 것이다.
통신망 통합과 관련이 있는 정부부처 및 산하기관은 통합주체인 체신부를 비롯하여 내무부 국방부 건설부와 대검찰청 철도청 한국전력 등이었다. 국방 부의 경우 육군과 공군.해군의 통신망이 모두 포함되었다. 그런데 내무부나 국방부 대검 등 권력기관은 끗발이 약한 체신부가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찬상대였다. 실제로 체신부장관으로서는 거물급인 최광수장관이 회의를 소집하는데도 관련부처에서는 국장급이 얼굴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최장관이 3군의 통신감 회의를 소집하면 통신감들은 대통령의 지시사항이라는 점 때문에 이의를 달지 않았으나 막상 실무자회의가 열리면 실무자들은 딴전을 피웠다.
그러나 당시는 5공 초기로서 절대권력이 지배하는 획일화된 사회였다. 체신부가 아무리 끗발이 없는 부처라 해도 절대권력의 핵인 대통령의 명령에 내놓고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체신부는 1981년 12월에 "국가 기간통신망 통합계획"을 수립한 다음 체신부장관 주재로 소관부처 차관회의 를개최하고 통합의 원칙에 합의를 보았다.
이어 이듬해 1월에는 체신부가 먼저타기관의 중계소 시설을 맡아 운용한 다음 시설의 인수는 나중에 한다는 "선운용 통합 후시설통합"방침을 세워 각 부처에 통보하는 한편 관련된 7개부처장관의 합의를 거쳐 2월5일에는 통신망 통합계획에 대한 전대통령의 재가를얻었다.
1982년은 한국통신이 출범한 해였다. 따라서 통신망 통합에 관한 원칙결정 과그에 따른 타 부처와의 교섭은 체신부가, 그리고 통합을 위한 실무작업은 한국통신이 담당하게 되었다. 통합작업의 실무책임자로 활약했던 체신부 이 인학과장으로부터 타부처와의 교섭과정을 들어보자.
"통신망 통합작업에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각 부처를 설득하는 일이었는데 검찰이 가장 완강하게 반대했어요. 못지않게 강하게 반대한데가 육군 이었어요. 세번째가 경찰이었죠. 먼저 검찰을 설득할땐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줬어요. 인입선을 이중으로 해달라, 단속장치를 해달라는 등의 요구를 다들어줬죠. 다음이 국방부인데 해군과 공군은 원칙에는 찬성했어요. 특히 해군은 낙도의 마이크로웨이브 시설을 유지하는 것이 힘든 일인데 당신네들이 다해달라 는 식으로 나왔어요. 공군의 경우 레이더기지 등 특수지역을 제외하고는 통합하기로 합의했구요. 그런데 육군은 쉽사리 응하지 않았어요. 그래서국방부 는 국방부대로, 육본은 육본대로 따로 만나 합의를 받아냈어요.
그런다음 최종적으로 주영복 국방부장관으로부터 대통령에게 올릴 결재문서 합의란에 맨 먼저 사인을 받았어요. 그 문서를 관련 6개부처 장관에게 돌렸더니군소리없이 사인을 하더라구요. 그렇게 해서 총리를 거쳐 대통령까지 일사천리로 결재를 받았죠" 한국통신과 통신망 통합에 관한 합의가 맨 먼저 이루어진 곳은 대검찰청이 었다. 1982년 8월30일 한국통신과 대검사이에 국가기간 통신망통합협정을 체결한 것을 시작으로 이튿날에는 건설부와, 9월30일에는 철도청과, 11월30일 에는 내무부와, 12월30일에는 한국전력과 협정을 체결했다. 통합의 원칙에는 일찍이 합의했으나 국방부와의 통합이 이루어진 것은 이듬해였다. 1983년 3월부터 한국통신과 국방부는 국방부의 통합대상시설에 대한 합동조사를 실시한 후 그해 12월 양자간에 통합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한국통신이 국방부의 통신망시설을 인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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