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22)

80년 12월19일 "데이터통신 육성정책"에 대한 전대통령의 재가를 얻음으로써데이터통신 전담회사의 설립원칙이 결정되었으나, 그후 설립을 뒷받침할구체적인 움직임이 없었다. 이듬해 3월에는 체신부장관이 경질되어 김기철 장관이 물러나고 최광수 장관이 들어왔는데 최장관은 데이터통신 전담회사의 설립에 적극성을 보일 겨를이 없었다.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설립문제가 발등 의 불로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해 5월 오명 비서관이 체신부차관으로 발탁됐다. 오차관은 부임하자마자 데이터통신망의 확보를 눈앞의 시급한 과제라 강조하며 데이터통신 전담회사 의 설립문제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는 김정열 전무국장 등 실무자들에게 "데 이터통신사업 육성정책"을 구체화할 세부계획을 수립케 했는데 그해 8월1일 "데이터통신사업 육성정책추진계획"이 체신부 방침으로 확정됨에 따라 전담 회사의 설립추진체제와 일정이 구체화되었다.

전담회사의 설립은 설립추진위원외와 실무작업반을 구성하여 추진하기로 했다. 전담회사 설립에 관한 주요사항을 결정하는 설립추진위원회는 체신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체신부 간부 6명과 외부의 전문가 7명으로 구성됐는 데 전문가중에는 청와대 경제비서관 홍성원, 컴퓨터이용연구원장 이용태, 전 기통신연구소 선임연구부장 경상현,전기통신연구소 책임연구원 이원웅, 전산 개발센터장 성기수 등이 포함돼 있었다.

설립추진위원회 밑에는 회사 설립에 관한 실무작업을 담당할 기구로 실무 전담반을 두었는데, 용산우체국장 박종현을 비롯한 체신부 직원 5명과 한국 과학기술원, 전자기술연구소, 전기통신연구소의 연구원 5명으로 구성되었다.

실무전담반은당시의 체신부 청사 7층의 별실에 자립잡고 데이터통신 전담회 사 설립의 기본 방침과 영업방향 및 예산편성작업에 들어갔다.

이처럼 실질적인 설립작업은 실무전담반이 맡았고, 총지휘자는 설립추진위 원회 위원장 오명 차관이었다. 오차관은 실무전담반에 값비싼 집기와 비품을 갖춘 사무실을 제공하는 대신 실무전담반장 박종현에게 매일 5분씩 추진사항 을 보고케 하는 방법으로 작업 진행을 채찍질했다. 박종현은 1970년부터 시작된 체신업무 전산화작업에 참여한 후 오랫동안 그 분야에서 업적을 쌓은결과 체신부내에서는 컴퓨터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그는 5분간의 보고 거리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매일 열심히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는 차관실이 너무 바빠 보고할 틈이 없었다. 박종현은 비서관에게 "사 실은 보고 거리도 마땅찮으니 다녀갔다고만 전해 달라"며 차관실을 빠져 나왔다. 이튿날 보고를 하러 차관실에 들어서자 오차관이 대뜸 물었다.

"왜 어제는 안오셨습니까?" "보고 준비를 해가지고 왔는데 차관님이 워낙 바쁘셔서 비서관에게 얘기하 고그냥 갔습니다" 그러나 오차관은 비서관을 불러 놓고 정색을 하며 따졌다.

"자네가 차관이야. 내가 매일 5분씩 만나겠다고 했으면 지켜 주는 것이 자네가 할 일 아니야" 오차관은 옆에 있는 사람이 바짝 긴장할 만큼 비서관을 몰아붙였다. 그것은박반장에 대한 질책이기도 했다. 그 후부터 박반장은 하루 5분간의 보고를위해 죽기살기로 일했다. 그 결과 그 해 11월에는 "정보통신전담회사 설립안 이라는 계획서를 만들어 김대통령에게까지 보고를 마침으로써 한국데이터통신주식회사의 설립이 정부방침으로 확정되었다.

"앞으로 데이터통신 전담회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며,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또 어떻게 하면 먹고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중점적으로 따졌는데 워낙 생소한 분야가 되어서 개념이 잘 안잡혔습니다. 그래서 외국 서적 도보고 전문가의 조언도 듣고 하면서 전담반원들이 분담해서 검토한 사항을 주워 모아 "데이터통신전담회사 설립안"을 만들었던 거죠"전담반장 박종현의설명이었다. 회사 설립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경영의 전문성과 독자성을 보장하 고정부 지원하에 민간 주도로 운영될 수 있도록 상법상의 주식회사로 설립하되경영은 전문가가 전담하도록 하여 자본에 의한 경영 지배를 배제했다. 초기의 자본금은 한국통신의 출자를 20억원, 민간기업의 출자를 50억으로 하여82년 2월에 회사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데이터통신 전담회사를 상법상의 주식회사로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애초에 체신부에서 바랐던 회사의 모형은 특별법에 의한 특수법인이었다. 주식회사로 발족할 경우 주주의 확보가 어려우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데이터통신은 사업적인 측면에서 볼 때 수요가 부족하여 채산성을 기대 하기 어렵기 때문에영리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민간기업이 참여를 희망할 리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예상한 대로 민간기업의 반응은 냉담했다. 체신부는 전문가들을 전경련이 나상공회의소로 보내 투자설명회를 가졌으나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업들은 뭐가 뭔지도 모르는 사업을 정부가 앞장서 추진해 나가 려하는데 대해 당혹해 했다. 그만큼 데이터통신, 나아가 정보화사회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낮았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체신부는 통신 관련 기업과 언론 사대표들을 체신부 회의실로 불러 다시 투자설명회를 가졌다.

"앞으로 다가올 사회는 정보화사회다. 정보화사회란 컴퓨터와 통신의 결합 으로 이뤄지는 사회로서 정보가 중심이 되어 가치를 창조하는 사회다. 종래 의농업사회와 공업사회에서는 가치를 생산하는 데 있어서 물질이나 에너지가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으나 정보화사회에서는 정보가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된다. 이러한 정보화사회의 기반구조가 되는 것이 데이터통신이다. 데이터통신이 란서로 떨여져 있는 컴퓨터와 컴퓨터간에, 또는 컴퓨터와 단말기간에 통신회 선을 통해 정보나 데이터를 주고 받는 것이다. 한 마디로 통신회선을 통해 컴퓨터간에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남의 나라에 뒤떨어졌기 때문에 식민지로 전락했던 쓰라린 경험을 지니고 있다. 이제 다 시정보화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낙오된다면 우리는 영원한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데이터통신을 육성.발전시켜 정보산업사회를 조기에 이룩하는것을 중요정책목표로 삼고 데이터통신 전담회사를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체신부는앞으로 강력한 정책의지를 가지고 신설될 데이터통신주식회사를 키워나갈 것이다" 체신부 사업관리과장 이인학이 이러한 요지의 설명을 했다. 그러나 기업들 은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또 한번의 투자설명회를 가졌다. 역시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체신 부는 신설회사의 장래에 대해 정부가 어느정도 보장을 해주어야 한다고 판단 하고 또다시 관련기업들을 불러 모았다. 이번에는 오명차관이 직접 나섰다.

"데이터통신 전담회사가 설립될 경우 초기에는 투자를 많이 해야 하는데다수요도 부족하기때문에 이익을 남기기 어렵다. 따라서 앞으로 5년동안은 이익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회사를 발전시키겠다는 게 정부의 확고한 의지이니 만큼 5년 후에는 그 나름대로 가치있는 회사가 될 것이다.

만약 일상적인 경상운영비가 안 나온다면 정부가 어떤 방법을 쓰든간에 그것을 보장해 주겠다. 그 대신 특정기업이 7%이상의 주식을 가질 수는 없다.

7%내에서참여해 줬으면 좋겠다" 신설회사의 장래에 대해 정부가 보장해 주겠다는 오차관의 말에 기업들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기업의 간부는 "정말 체신부에서 보장해 줄거요? 하고 은근히 묻기도 했다.

"장.차관의 말씀은 식언이라 생각해도 될 겁니다. 그러나 국.과장들은 체신부에 오래 몸담을 사람들입니다. 증인이 많지 않습니까"이인학 과장의 대꾸였다. 오차관이 직접 나서서 설명을 하자 그가 개인회사를 만들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그는 개의하지 않고 밀고 나갔다.

아무튼 오차관의 발언이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 두 기업이 주주로 참여하겠다고 나섰다.

82년 1월27일 체신부 회의실에서 테이터통신회사 설립발기인회가 열렸다.

최광수장관과설립발기인들이 참석한 회의에서는 이우재 한국통신 사장을 발기인회장에 선임하여 회사 설립 절차의 결정 및 집행에 관한 모든 책임을 부여했다. 그리고 출자회사의 자격을 전자공업진흥회 회원사와 텔레비전방송국및 통신사로 한정하되 민간회사의 출자 한도액은 재벌그룹의 경우 1개 그룹 당 7억원 이하, 일반 회사의 경우 5억원 이하를 원칙으로 하여 특정 그룹이 나 회사에 지분이 편중되지 않도록 했다.

2월 2일에 열린 2차 설립발기인회에서는 정관을 확정했는데, 이에 따라 회사의 상호를 한국데이터통신주식회사(Data Communication Corporation of Korea DACOM 로 하고, 정보교환회선 및 특정통신회선의 운용 등 정보통신사업, 정보처리 및 정보의 수집.가공 및 판매, 국내외 데이터뱅크와의 연결 운용 등 일련의 사업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 무렵에는 출자를 희망하는 회사와 그 액수가 대폭 늘어 삼성과 럭키금 성그룹이 각각 25억원, 한국방송공사가 7억원 등으로 28개 회사 86억 8천만 원에 이르렀다. 설립발기인회는 이를 조정하여 주주회사를 한국통신을 포함 한26개 회사로 조정하고 출자금도 59억8천만원으로 조정했다. 주주의 지분 비율을 살펴보면, 한국통신이 20억원으로 3분의1, 한국방송공사가 3억5천만 원으로 5.8%, 연합통신이 2억원으로 3.3%, 삼성그룹은 한국전자통신 등 3개회사가 7억원으로 11.7%, 럭키금성그룹은 금성반도체 등 5개 회사가 역시7억원으로 11.7%를 차지했고, 나머지는 대영전자공업 등 중소기업이 차지했다. 그해 3월10일에는 26개 회사의 발기인 대표로 구성된 창립총회가 열렸는데 설립발기인 회장 이우재를 의장으로 하여 진행된 이 창립총회에서 이용태를비롯한 13명의 이사가 선임되었다. 이어서 열린 제1회 이사회에서는 초대 사장에 이용태를 선임했다. 그후 3월29일 법인 설립등기를 마침으로써 한국 데이터통신 주식회사라는 새로운 정보통신 전담회사가 탄생했으며, 이로써 이 땅에 정보통신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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