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18)

우리나라 전자교환기 개발의 역사는 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무렵 청와대는 대통령이 지방을 순시할 때 즉시 연락할 수 있는 이동통신망을 구성 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공중통신망이 아닌, 독자망의 EMD 교환기에 무선통신 망을 연결, 운용하기 때문에 성능이 좋지 않은데다 통화가 이뤄지지 않는 지역이 많았다. 따라서 이 통신망 개선의 필요성을 느낀 청와대 경호실은 그 과제를 KIST에 맡겼다. 즉, 최소한 전국의 5대 도시와 통화가 될 수 있는 무선통신망을 구성하고 싶으니 거기에 사용될 교환기를 개발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과제는 KIST 내부에서 정만영 부소장과 안병성 방식기기연구실장 팀에게떨어졌다. 안실장이 중심이 되어 제안서를 작성했는데, 그 내용은 72년 2월부터 시작해서 1년 동안에 개발해 내겠다는 것이었다. 총개발비용은 6천만 원. 그 당시 KIST에서 따낸 웬만한 프로젝트가 1백~2백만원에 불과할 때이니만큼 대어를 낚은 셈이었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를 따낸 안실장은 그 돈으로 승용차를 구입했다고 해서 KIST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청와대측 에서 이 프로젝트의 추진을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암호명을 붙인 결과 "메모 콜 프로젝트"라 불리게 되었다.

일은 처음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다. 프로젝트를 주는 데는 청와대였으나 예산을 지원해 주는 데는 체신부였다. 그런데 체신부의 행정적인 뒷받침이 늦어져 그해 8월에야 예산이 배정되었다. 예정된 개발 기간 1년에서 반년을 까먹은 셈이었다. 게다가 KIST 연구원들 가운데는 EMD 교환기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프로젝트의 핵심은 EMD 교환기에 컴퓨터를 부착하여 제어를 정확히 함으로써 즉시성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따라 서예산이 풀리는 대로 일본에서 미니컴퓨터인 NOVA 1200을 사들여 작업을 시작했는데 EMD와의 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따라서 EMD 교환기를 뜯어내고교환소자를 시분할 전자교환방식으로 바꾸었는데, 그것이 일종의 소형 전자교환기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프로젝트의 성격이 당초의 계획과는 완연히 달라졌던 것이다.

시작할 당시의 10여명에서 30여명으로 늘어난 연구원팀이 밤을 세워가며노력한 결과 서울을 포함한 5대 도시에 설치할 교환기 5대를 만들어냈으나, 작품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통화는 가능했으나 통화 품질에 문제가 있었다. 너무 늦게 착수한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청와대 멤버들이 통화 시험을 해보더니, "이 정도면 통화가 되는 것은 알겠는데 각하께서 쓰시기에는 안정화가 안된 것 같아 안되겠다." 하고서는더작업을 진전시켜라 말라는 말도 없이 손을 떼어 버렸어요. 그 상태에서 정지돼 버렸던 거죠." 프로젝트 책임자 안병성의 회고였다.

그것으로써 메모콜 프로젝트는 끝났다. 비록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개발 책임자의 입장에서는 아까운 일이었다. 조금만 더 투자하면 그럴듯한 작품이 나올 것 같았다. 안병성은 개발 기간 중에 전화기나 모뎀의 구입 등으로 거래 관계에 있던 GTE 홍콩대리점 사장에게 시제품의 평가를 부탁했다. 그런데 미완성의 개발품을 구경한 대리점 사장은 뜻밖의 수준에 놀라 GTE 본사에 보고했다. 기술자를 파견하여 KIST의 개발품을 검토한 GTE 본사는 예상외로 기능이 우수하고 상품가치가 있다는 판단 아래 KIST와 공동개발할 것을 제의했다. 한국의 통신시장을 넘보고 있던 GTE로서는 그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GTE는 50만달러의 개발비를 제공하는 대신, 개발 제품의 공업소유권은 그들이 소유하며 개발한 교환기의 생산공장을 한국에 유치한다는 조건으로 KIS T와 5백회선 규모의 자동구내교환기(PABX) 공동개발계약을 체결했다. 당초 계약에는 개발기간이 2년으로 되어 있었는데 약간 지연되어 77년 5월에 PWM 방식의 구내교환기 개발이 완료되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발된 시분할 전자교환기로서 GTK 500(GTE/KIST500)으로 명명되었다. 76년 KIST에 서처음 개발할 때는 KIST 500이라 명명했으나 GTE와 공동개발을 한 뒤 그렇게명칭을 바꾸었던 것이다.

"GTE측에서 개발비 50만달러를 줄 테니 더 개선해서 한국에 맞는 PABX를 개발하자 해서 74년부터 KIST와 GTE가 연결돼서 그쪽에서 전문가가 파견돼 왔어요. 그 당시 KIST의 실력은 회로를 그려 만들고 거기에 소프트웨어를 집어넣는 것은 할 수 있는 정도였는데, 통신 개념이 없었어요. 그런데 GTE 사람들이 와서 CCITT 룰이 뭐고, 다큐멘테이션은 어떻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알려줬죠. 그렇게 해서 76년에 합격품을 만들어냈던 겁니다."메모콜 프로젝트에 초년병으로 참여했던 연구원 박항구의 이야기였다.

한국 최초의 전자식 구내교환기가 개발되자 GTE는 76년 그 기술을 인수해 서GTE코리아라는 현지법인을 세우고 합작할 파트너를 물색한 끝에 삼성을 선택했다. 비록 사설 구내교환기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통신사업에의 참여를 갈망했던 삼성으로서도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리하여 77년 12월 삼성과 미국의 GTE가 합작투자로 설립한 삼성GTE통신(주)이 탄생하여 전자식 구내교환기를 생산, 판매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내교환기 하나의 기종으로는 재미 를보기 어려웠던 GTE는 한국의 국설교환기 시장에의 참여가 어려움을 깨닫자80년 4월 그들의 소유 지분을 삼성에 넘기고 한국에서 철수했다.

메모콜 프로젝트를 거쳐 GTK 500을 개발하는 동안 KIST내에는 30여명의 연구 인력이 양성되었다. 교환기 개발사업을 시작하기 전까지 KIST의 방식기 기연구실은 안병성.이주형 등 10여명의 연구원에 불과했으나, 메모콜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여재흥 강진구 박항구 등 새로운 연구원을 모집하고 타 분야의 전문가를 차출하여 30여명으로 늘어났다. 그 후 GTK 500의 개발이 끝나고 삼성GTE통신이 설립될 무렵 이주형 강진구 천유식 등 20여명이 삼성으로넘어가고 KIST에는 안병성.박항구 등 10여명이 남아 명맥을 유지했다.

한편 메모콜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난 직후인 74년부터 KIST는 전자교환기 개발계획안을 계속 작성하여 시분할 전자교환기의 국내 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건의서 형식으로 된 이들 계획서는 "국가의 신경인 교환기를 외국에 의존함은 산업정책상으로는 물론 안보면으로나 문화면으로 불가하다."고 지적한 다음, "지금까지의 공간분할반전자방식 연구를 지양하고 시분할 전전자 방식 연구로 전환하고 있는 선진국의 예를 따라 우리도 전전자방식 교환기의 자체 개발에 착수할 시기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연구 노력은 77년 12월 통신기술연구소가 설립되면서 그대로 이어 졌다. 이 연구소가 설립되자 KIST 방식기기연구실 팀이 그대로 넘어가 제2부 소장 밑에서 교환기연구 팀을 형성하여 전자교환기 개발작업을 계속했다. 이에앞서 그해 10월에는 안병성 박항구팀이 체신부로부터 1백만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시분할교환기 개발계획서를 작성했는데, 이는 제1기종인 M10CN 다음에보급할 교환기는 국내에서 개발한 시분할 전자교환기로 한다는 애초의 계획에 따른 조치였다. 연구소 팀은 3개월의 작업끝에 장기개발계획서를 체신 부에 제출했는데, 그것이 실제로 전화국에 설치할 국설용 전자교환기 개발계 획의 시초였다.

그 프로젝트 덕분에 새로이 발족한 통신기술연구소는 첫해인 78년에 체신 부로부터 3천3백만원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국설용 전자교환기 개발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해는 시외교환기와 EMX 텔렉스 기종의 선정작업 등이 겹쳐 전자교환기 개발작업은 지지부진했다. 이듬해인 79년에는 1억 4천8백만원의 연구비가 투입되었고, 또 그 동안 연구소를 떠나 있던 여재흥. 천유식 등이 합류하여 5~6명에 불과하던 연구인력이 30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리하여 통화 로 부문은 박항구, 제어 부문은 여재흥, 소프트웨어 부문은 천유식이 맡아그해말에 만들어낸 것이 96회선짜리 1차 시험기였는데,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발된 국설용 전자교환기였다.

"미흡하나마 교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든 게 79년말에 개발된 1차시험기였어요. 그런데 스위치 부문 등 극히 일부만 국내에서 개발했고, PCM 장비나 컴퓨터 등은 미국에서 사다 붙여서, 통화가 되는 국설용 교환기1 차 모델을 만들었던 거죠." 개발 책임자인 안병성 부소장의 이야기였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80년에는 1억원을 확보하여 2백회선 용량의 2차시험기를 제작했고, 81년에는 1억 6천만원의 연구비를 투입하여 5백회선규모의 3차시험기를 개발하게 되었다.

"80년에는 시분할교환기 개발 프로젝트가 없어졌어요. 체신부 담당 과장이 지금 전자교환기를 도입해서 운용하기도 바쁜데 교환기를 개발할 틈이 어디있느냐고 해서 그 프로젝트가 죽어 버렸어요. 그때 마침 농어촌용 교환기 시범기종이라 해서 노던 텔레컴의 DMS 10을 구리에, 스트롬버그 칼슨의 DMO를 원당에 한 대씩 설치해서 시험운용을 하게 되었는데, 그 작업을 우리가 맡게됐어요. 그래서 농어촌용 교환기 시설지원연구비를 받아, 그 중 일부는 시설 지원용으로 그대로 쓰고, 나머지 일부는 융통성을 부려 교환기 개발 프로젝트에 돌려 썼던 거죠." 3차에 걸친 시험기 개발에 줄곧 참여했던 연구원 박항구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체신부나 연구소는 전자교환기 개발에 필요한 제반 여건이갖춰지지 않아 충분한 예산과 인원을 투입하기 어려웠다. 체신부 입장에서 는두 차례에 걸친 전자교환기 도입 기종의 선정과 설치작업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데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한국통신의 설립으로 전자교환기 개발 사업에 관심을 분산할 겨를이 없었다. 한편, 연구소 입장에서는 설립된 지 일천한데다 연구소 건물도 확보되지 않아 광화문우체국에서 남산타워 건물로 옮겨 다니던 때여서 연구 분위기가 제대로 조성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안병성 부소장 팀이 의욕적인 개발계획을 제시하자 체신부는 우는 아이 에게 젖 한 모금 주듯 목을 축일 정도의 연구비를 지원함으로써 체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실제로 78년부터 시작된 전자교환기 개발사업은 81년말까지 4년에 걸쳐 연구비 4억여원이 투입되어 3차에 걸쳐 시험기를 제작했으나 주로 전자교환기 구조에 대한 이해와 개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는 정도의 기본적인 호처리 기능의 실현에 불과했다. 그러나 10년에 걸쳐 30 여명의 전문인력을 양성했다는 것은 뒷날 TDX를 개발하는데 좋은 텃밭이 되었던 것이다.

"시분할 전자교환기에 대해 머리 속에서나마 이렇게도 그려 보고 저렇게도그려 보며, 이것은 이런 데 문제가 있으니까 이렇게 고쳐야 되겠구나 하고 개념 정립을 할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성과라 할 수 있겠죠. 또 전자교환 기에 관한 자료도 많이 모아 놓았고, 인력도 많진 않지만 25명쯤 모아 놨어요. 웬만한 일을 하는데는 능력있는 사람 20여명 있으면 괜찮은 겁니다. 그들 한 사람 앞에 5명씩만 붙여 주더라도 1백명을 모아 놓은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전기통신연구소 선임연구부장 경상현의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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