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취-(튜너;3)

금성알프스느 72년 9월 일본 기술지원을 받아 국내 최초로 우리 기술진에 의해 설계된 트랜지스터식 "황금접점 튜너"를 생산, 금성사 TV에 처음으로 탑재한다. 우리 기술진이 일본의 도움을 받아 자체 생산에 돌입, 국산 튜너가 처음으로탄생하게 된 것이다.

금성알프스가 서둘러 "황금접점 튜너"개발에 나선 것은 70년대 초 국내 난방 용 연료가 주로 연탄에 의존해야 했고 이 19공탄에서 다량 발생하는 아황산 가스는 제품 표면을 변색시킬 뿐 아니라 전기 도통에 막대한 지장을 주는 등 납땜에 치명타를 가했기 때문이다.

70년대초반 서울에서는 대부분의 난방용 연료가 19공탄이었으며 지방에서는 일부 연탄과 나무로 땔감을 이용하면서 아황산가스에 의해 TV.라디오등 가전 제품의 접점 불량률이 현격히 늘어났다. 이당시 고장이 발생하면 두들겨 흔들면 원상 복귀된다는 것이 상식으로 통하고 이것을 연유로 한참 후에도 국산품은 두들겨야 말을 듣는다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금성 알프스의 "황금접점 튜너"의 황금접점 기술은 타 부품의 접착 기술에도 응용 되면서 금성사 이미지를 한층 재고시키켰다. 금성알프스는 이제품이 인기를 얻으면서 수요가 크게 늘어나자 73년 5월 공장을 부산시 동래구 부곡동 에서 경남 양산읍 북정리 191번지로 확대이전, 본격 양산 체제에 돌입했다.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일본 업체들이 아황산가스로 인한 불량을 줄이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전기.전자제품은 이때부터 "황금 접점"에 의한 납땜 을 적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금성알프스는 이 시점에서 진공관식 제품에서 트랜지스터(TR)튜너로 전환 시켰으며 이후 이 황금접점 튜너의 자체개발을 계기로 74년들어 미국 모토롤러 사에 국내 최초로 국산 튜너를 직수출하는 개가를 올렸다.

금성알프스는 73년부터 VHF 튜너 소형화 작업에 나서 트랜지스터보다 한단계 수준을 높인 메카 튜너를 선보였데 이제품은 장수모델로 기록될 정도로 80년 2월까지 계속 생산됐다.

금성알프스가 독자 모델을 내놓으면서 68년 삼성과 일본 산요가 합작한 삼성 산요전기에서는 73년 8월8일 삼성산요부품사업부를 별도 구성, 튜너 생산에 나서기 시작했는데 삼성산요도 금성알프스와 같이 초창기 시행착오를 수없이겪었으며 생산된 튜너는 전량 삼성산요 자체 수급용으로 사용했다.

삼성산요전기에서 처음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품목은 기구식 메카 튜너로 가장 원초적인 진공관식이었으며 선진 일본 기술을 이전 받기 위해 창립 멤버 인 문봉모 이사를 비롯 정우창 이사, 황태원 이사등이 일본. 미국을 안방 드나들듯이 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완제품을 들여와 똑같이 제작 했음에도 불구하고 특성이 나오지 않아 애를 태우기도 했다.

금성알프스와 삼성산요전기가 등장하면서 60년대초 미 오크사와 합작으로 설립됐던 동성전자가 빚을 보지 못하면서 대한전선 계열에서 인수하였고 나중에 대우전자부품이 흡수.합병하게 되었다.

자식 튜너 (VVC)를 생산, 기술적인 측면에서 국내 튜너 산업을 선도했을 뿐아니라 일본 업체들과 어깨를 겨누었으나 해외영업력이 미약하고 내수시장에 서 기반을 마련하지 못해 부실화되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삼성산요전기가 튜너 사업에 참여하면서 금성알프스와 선의의 경쟁체제에 돌입 지금까지 국내 튜너 산업의 쌍두마차를 형성하고 있다.

후발로 참여한 삼성산요전기는 금성알프스보다 앞서야 한다는 경쟁의식의 발동으로 일본 산요에 전격 의존하지 않고 일본 샤프.알프스.미국 제니스사 등이 개발하는 제품 정보 입수에 혈안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금성알프스도 경쟁업체가 나타나면서 새로운 각오로 신제품 개발에 전력투구 했으나 한결같이 일본 기술제휴업체들이 기술 이전에 뜸을 들이거나 핵심 기술 이전을 기피, 기술확보에 애로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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