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분야에서는 미국이 대부분 새로운 개념의 신제품을 개발한다. 하지만 이것을 소비자의 기호에 맞게 재구성, 상품화해 세계시장을 휩쓰는 것은 일본 이다. 미국의 첨단기술과 일본의 고기능 상품이 일단 세계시장을 휩쓸고 지나 가면 그나머지 몫은 한국이다. 일본제품을 적당히 모방해서 그보다 훨씬 낮은 가격의 제품들을 내놓는다.
일본이충분히 "포식" 을 끝내고 남겨주는 시장을 공략하는 것이다. 물론 이마저도 컴퓨터나 주변기기 등 정보기기 분야에서는 대만이라는 경쟁국과 "파 이"를 서로 쪼개야만 한다.
이것은한국 전자산업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점에서 기인한다. 대재벌에 만 집중 축적된 자본 구조로 인해 전문 특화기술의 연구개발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기반기술이 취약하니 자연히 승부는 저임금과 숙련된 노동력이 최대무기가 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대량 생산이라는 "촉매"가 동원되면 "메이드 인 코리아"가 세계 시장 에서 살아남는 확실한 전략이 된다. TV.냉장고.VCR.오디오 등 세계 시장에서 일본에 뒤이어 확고한 2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고 일부는 일본의 자리를 넘볼 정도라는 가전제품이 대표적이다.
그러나이같은 상황은 어디까지나 80년대 후반기까지로 국한된다. 90년대에 는 세계 시장이 변하고 있다. 그 한복판에는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태국.중 국.인도등이 있다. 소위 후발개도국이다.
이들은전자산업의 구조 자체가 한국의 그것과 너무도 흡사하다. 기반 기술 이 없어 외국기술과 외국자본의 유치로 조립생산을 시작하는 것도 그렇고,생 산기술력을 앞세워 중저가 시장을 공략하는 전술적 접근방법도 비슷하다.
한국과 비교해 뛰어난 점은 절반에서 20% 정도에 불과한 값싼 인건비와 풍부한 노동력이다. 그간 한국이 세계시장진출의 첨병으로 활용했던 무기를 이들이 들고 나오고 있다. 그 무기의 성능은 "경제 논리"로만 치면 한국제에비해 훨씬 우수하다.
몇가지통계수치만 보면 이를 간단히 알 수 있다.
지난92년 미국시장에 수출된 한국의 컬러TV규모는 1억4천6백만달러다. 같은해 중국의 수출 액수는 1억1천7백만달러. 절대액수를 비교해도 한국이 최강 의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컬러 TV가 후발 개도국인 중국과 별로 차이가 없다. 중국이 바로 턱밑에까지 추격해온 것이다.
더욱충격적인 것은 전년대비 증가율이다. 한국의 컬러TV 수출은 91년에 비해 무려 27%가 감소했다. 이와 반대로 중국은 50%라는 폭발적인 증가세를 나타냈다. 물론 이것은 일본기업들의 중국 현지 생산에 의한 수출액 까지 포함된 것이긴 하지만 제품의 기능이나 완성도를 차치하고 단순 수치만 비교해 도 엄청난 것이다.
냉장고역시 비슷하다. 92년 한국의 대미 냉장고 수출액은 1천3백만달러. 중국은 1천1백만달러였다. 한국산의 수출이 그 전해인 91년보다 17%가 줄어들었는데 비해 중국산은 오히려 21%가 늘어났다.
정보산업의총아인 소프트웨어의 경우 한국의 수출량은 그 액수를 집계 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미미하다.
전자산업분야에서경쟁국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도는 어떤가. 지난해에만 이 나라가 수출한 소프트웨어의 총액은 3억5천만달러이다. 92 년에 비해 무려 55%가 늘어난 수치다. 이 분야에 국한한다면 인도는 한국보다 훨씬 "앞서가는 후발개도국"이다.
후발개도국이달려오고 있다. 경제성장수준에 맞춰 적당히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을 위협할 정도로 맹렬한 속도로 뛰어오고 있다. 어떤 분야 에서는추격은 커녕 이미 한국을 앞질러 버렸다.
우리에게"무지" "가난" "부패"의 상징으로 각인되어왔던 후발개도국은 이제 더이상 그 같은 인식을 거부하고 있다.
싱가포르를축으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은 "아세안 국가"로서 거대한 전자 부품및 완제품 공급기지를 형성하고 있다.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중국과 인도는 전자산업 전 분야에 걸쳐 무차별 공격을 펼치고 있는 앙팡테리블 무서운 아이들)"이다.
첸센총말레이시아 산업 개발청 부국장은 "말레이시아의 전자산업은 92년 현재 국내 제조업 생산량의 37%를 차지, 최대 산업군으로 도약했고 85년 이후연평균 성장률도 33% 를 기록하고 있다"고 밝히고 "세계 3위의 수출국 으로 그간 주력군 역할을 했던 반도체에서 탈피, 가정용 및 산업용 전자제품이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에는87년 이후 1천1백60개의 외국 전자업체가 진출했고 그 대부 분은 마쓰시타.소니 등 일본업체이다. 특히 16개 계열사가 진출해 있는 마쓰 시타는 이 나라 국내 총생산의 3%를 점유할 정도인데 이 회사에서 생산한 룸에어컨은 92년 2백10만대를 수출, 세계 2위의 자리를 확보하기도 했다.
말레이시아는자국의 경제 성장 견인차로 전자산업을 지목, 해외기업의 유치 에 매우 적극적이다. 심지어 1백% 투자 및 경영권 보장을 허용하고 있기도하다. 이 때문에 이 나라에는 페낭을 비롯, 주요공단에 일본의 가전 및 반도체 미국의 반도체업체들이 집중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생산기술력만놓고 보면 말레이 시아는 한국 전자산업을 위협하는 최대의 경쟁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아직 규모는 작지만 태국의 약진도 주목할만 하다. 수팟 림파퐁 투자 청 과장은 "태국이 전자분야의 국제적 하청기지로 충실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고 설명하고 "특히 수출부문에서 반도체및 컴퓨터 부품을 중심으로 85년 이후 해마다 43%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태국역시 외국기업의 유치를 통한 수출 확대, 자립기반 확보등을 겨냥 하고있다.노동력에 의한 단순 반도체 조립에서 탈피, PCB.범용부품 등 다양한 전자제품의 생산 확충을 목표로 한국기업들에게도 합작 의사를 타진 하고 있다인도 네시아는 인근국가들에 비해 40%정도에 불과한 저렴한 노동력이 최대강점. 이 나라는 말레이시아의 성공에 자극, 비슷한 전략으로 전자산업 활성 화에 나서고 있다.
중국은이미 전자외에도 여러 분야에서 한국을 앞지르기 시작한 가장 강력한 도전자이다. 가전제품의 수출은 거의 한국 수준에 도달해 있고 최근에는 반도체.통신.컴퓨터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대표적인사례가 최근 중국 정부가 밝힌 반도체 육성방안 이다. 중국 정부는 향후 최대 유망품목으로 인정받고 있고 "산업의 쌀"로 간주되는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우선 15개 업체에 3억5천만달러를 투입, 생산 시설 확충을 지원 할 계聖이다.
중국은지난해 세계 반도체 생산의 0.4%인 1억7천만달러에 불과했으나 이를2 3%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계聖이다.
말레이시아와태국의 성공은 중국의 "성공 보장성" 을 더욱 높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의 반도체 수출에서 조립제품 비중이 아직도 30%, 30억달러를 차지하고 있지만 핵심인 인건비가 중국은 한국의 30%에 지나지 않는다.
인도는이제 막 전자산업에 눈을 뜨고 대시하고 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수 십년간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를 고수, 자립기반이 취약했으나 우수한 인력 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경쟁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이나라의 소프트웨어 수출이 3억5천만달러를 돌파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모토롤러의 최첨단 휴대형 위성전화 "이리디움"의 주요부품은 대부분 인도에서 생산 공급하고 있다. 최근에는 "방갈로 지방"에 IBM.HP.AT&T 등 세계 적 컴퓨터 통신업체들이 입주, 새로운 "실리콘 밸리"를 형성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는 단순히 풍부한 노동력과 저임금이라는 장점외에 "우수 인재" 라는 비장의 카드가 있다. 미국 유명대학의 이공계 학생중 아시아계로서는인도와 중국인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은 이들 국가의 잠재 역량을 더욱 크게 하고 있다.
후발개도국의추격을 뿌리치기 위한 한국 전자업계의 노력은 아직 뚜렸한 것이 없다. 기껏 임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 지역으로 생산 기지를 옮기는것이 대부분이다. 연구소나 기업들이 저마다 대비책을 주장하지만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이"메이드 인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중국" 제품이라고 해서 한국산 에 비해 저가격이던 시대는 끝났다. 이들 제품도 대개는 브랜드가 "소니" 마쓰시타 등 세계 유수의 기업이기 때문에 한국산과 경쟁이 가능한 시대가됐다. 한국이 이들과 차별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일본처럼 기술력에서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거나 아니면 가격과 품질 경쟁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중 한국의 현실상 개도국 시장을 직접 공략하고 경쟁하는 "정면돌파 방식"이 한국 에게는 유리하다는 지적이 많다.
현재로서는아시아 시장은 무한하다. 개도국은 한국의 경쟁 상대이면서도 시장을 "점령"해야 할 대상국이다. 이미 범용제품으로 승부하기에는 이들의 추격세가 너무 거세다. 차별화되고 현지화된 제품을 내세워야 한다. 아직은 생 산기술력면에서 한국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후발개도국을단지 제품의 공급거점, 생산기지로 파악하기 보다는 우리가 공략해야 할 신 시장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동남아지역 국가에서는 경제수준이나 사회환경상 미국에 수출하는 냉장고로는 메릿이 없다. 기능을 아주 단순화하고 더운 나라의 현실에 맞는 기능을 보강, 싼값에 판매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품의 현지화는 그래서 필요하다. 다행히 이 지역 국민들은 정서적으로 아직 한국산이 자신들이 만든 제품 보다 "고급(?)"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차별화는비단 이 지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싱가포르에서 최고의 수익 률을 올리는 기업은 왼손잡이 외과의사용 의료기기를 생산하는 업체이다. 일본이 장악한 시장을 넘보기에는 힘이 부치고 후발개도국의 가격. 물량공세에 흔들리는 한국이라면 이같은 니치 마킷(틈새 시장)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지사정에 정통한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한국 기업들은 그간이곳 상권을 장악한 화교들에게 에이전트 역할을 맡겼다. 하지만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최근삼성등 대기업들이 부랴부랴 지역 전문가를 양성 하겠다고 나서는 것도이런 문제점을 파악했기 때문이고 그 대응방식은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된다.
차별화.전문화. 현지화는 누구나 지적하지만 구현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한국기업들로서는 생존을 위해 나서야 한다. 미국 시장에서는 후발 개도국이 우리와 똑같은 무기 똑같은 전술로 싸움터에 나서고 있다. 상대가 수십만정 의 소총이라면 우리는 몇개의 미사일로 미주시장은 물론 그들 안방을 공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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