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보안기술이 약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특정 영역에서는 세계 시장에서도 경쟁할 만한 제품과 기술이 적지 않다.
네트워크에 접속한 단말을 식별하고 통제하는 네트워크접근제어(NAC), 관리자와 서버·데이터베이스(DB) 접근을 제한하는 특권접근관리(PAM)와 DB 접근제어, 중요 문서의 복사와 반출을 막는 문서보안(DRM)과 데이터유출방지(DLP) 등은 오랫동안 국내 금융·공공 시장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특히 국내 특유의 복잡한 환경에서는 보안기업들의 강점이 더욱 뚜렷하다. 망분리, 개인정보 보호, 감사기록, 폐쇄망, 오래된 핵심 시스템과 최신 클라우드를 동시에 운영해야 하는 금융·공공기관의 보안 문제는 제품 기능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실제 업무와 규제를 이해하고 세밀한 맞춤형 개발과 현장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 국내 기업들이 경쟁력을 갖춘 영역이다.
제로트러스트 분야에서도 변화가 시작됐다. 국내 시장은 하나의 제로트러스트 제품을 도입하기보다 인증, 단말, 접근통제, 네트워크, 데이터보안, 클라우드 기술을 여러 기업이 조합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정부 실증사업 역시 금융 오버레이망, 보안서비스에지(SSE), 클라우드 인프라, 모바일 개발환경,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인증·접근통제 등 다양한 모델을 여러 기업의 기술을 연결해 검증하고 있다.
지니언스는 단말 가시성과 NAC의 강점을 제로트러스트 네트워크접근(ZTNA)으로 확대하고 있다. 프라이빗테크놀로지는 기존 네트워크를 크게 변경하지 않으면서 접근통제를 세분화하는 오버레이 방식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니텍·피앤피시큐어·아스트론시큐리티·큐비트시큐리티는 인증·클라우드·DB·단말 보안을 나눠 맡는 통합 실증을 수행했다. 모니터랩·안랩·라온시큐어 등도 SSE 기반 모델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담당했다.

문제는 개별 기술이 아니라 전체 보안체계를 연결하는 구조다.
글로벌 보안기업들의 전략에서는 차이가 드러난다. 팔로알토 네트웍스는 네트워크 보안에서 출발해 원격접속, 클라우드, 단말, 데이터, 보안관제, 인공지능(AI) 보안까지 하나의 플랫폼으로 연결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네트워크에서 발견한 위험을 단말과 클라우드, 보안관제센터(SOC)의 대응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구조다.
아카마이 역시 인터넷과 웹·응용프로그램인터페이스(API) 보호, 대규모 디도스(DDoS) 방어, 외부 사용자의 내부 애플리케이션 접근, 데이터센터 내부 워크로드의 마이크로세그멘테이션을 서로 연결한다. 외부 공격면에서 시작된 위협이 내부로 확산되는 전체 흐름을 하나의 문제로 다루는 방식이다.
중요한 차이는 제품 개수나 기능이 아니다. 한 곳에서 발견한 위험이 다른 제품의 대응으로 얼마나 빠르게 이어지는지가 핵심이다.
가령 협력사 직원의 계정이 평소와 다른 장소에서 사용되고, 동시에 노트북에서 악성프로그램과 의심스러운 프로세스가 발견됐다고 가정해 보자. 이상적인 보안체계에서는 신원과 단말의 위험정보를 종합해 위험도를 높인다. 중요 시스템 접근을 제한하고, 관리자 권한을 회수하며, 기존 접속을 종료하고 단말을 격리한다.
모든 대응이 수초 안에 자동으로 이뤄져야 한다.
국내에도 각각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우수한 제품은 있다. 그러나 제조사가 다르면 정책과 데이터 형식, 관리화면도 다르다. 한 제품이 위험을 탐지해도 다른 제품이 관련 정보를 이해하지 못해 보안 담당자가 중간에서 판단하고 다시 명령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우수한 부품은 많지만 완성차를 구현할 설계도와 조립라인이 부족한 셈이다.
실증사업이 한 번으로 끝나는 구조도 문제다.
프로젝트마다 서로 다른 제품을 다시 연결하고 인터페이스를 새로 개발하며 운영규칙을 다시 만든다면 산업 전체의 통합 경험을 축적하기 어렵다.
실증사업에서 검증된 제품 간 연동 방식, 공통 데이터 형식, 정책구조, 공격 시나리오와 대응방법이 다음 프로젝트에서도 재사용돼야 한다. 실증사업의 결과를 일회성 성과가 아닌 산업의 공동 설계도로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격차는 데이터에서 발생한다.
글로벌 보안기업은 여러 국가와 산업에서 발생하는 공격을 동시에 관측한다. 한 국가에서 발견된 새로운 공격을 다른 국가 고객의 탐지정책에 반영할 수 있다. 고객이 늘면 더 많은 위협 데이터가 축적되고, 데이터가 많아지면 탐지 성능과 AI의 품질이 향상된다. 제품 경쟁력이 높아지면 다시 고객이 늘어나는 구조다.
기술과 데이터가 함께 발전하는 선순환 구조다.
반면 국내 기업은 특정 분야에서 강점을 갖추고 있지만 고객과 사업 지역이 제한적이다. 각 기업이 수집하는 위협정보와 운영 경험도 회사 내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국내 보안기업 10곳이 각각 우수한 데이터를 보유하더라도 서로 공유하지 못한다면 글로벌 플랫폼 하나보다 AI 학습에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가 적을 수 있다.
그렇다고 글로벌 기업처럼 모든 기능을 한 회사가 직접 개발하는 방식이 현실적인 해법은 아니다. 국내 보안산업의 강점과도 거리가 있다.
국내에는 인증, 단말, 네트워크와 서버 접근통제, 데이터와 DB 보안 등 각 분야에 특화된 기업들이 이미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전문기업들의 기술을 하나의 정책과 데이터 흐름으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외산과 국산을 구분하는 이분법도 해법이 될 수 없다. 글로벌 위협정보와 인터넷 엣지, 대규모 클라우드 운영이 중요한 영역에서는 글로벌 제품의 강점을 활용할 수 있다. 반면 국내 핵심 시스템과 규제, 내부망과 DB, 문서보안 분야에서는 국내 전문기업의 경쟁력이 크다.
결국 누가 전체 보안체계를 설계하고 정책과 데이터의 주도권을 확보하느냐가 중요하다.
국내 보안산업의 약점은 우수한 제품이 없다는 데 있지 않다. 우수한 제품들이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운영되는 데 있다.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보안제품이 아니라 제품과 기업, 실전 경험과 위협정보를 연결하는 역량이다. 여러 전문기업의 강점을 하나의 보안체계로 통합하는 능력이 국내 보안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핵심 과제다.
김인현 한국제로트러스트보안협회 회장(투이컨설팅 대표) ihkim@2e.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