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미 투자]'AI 전력' 골든타임 잡은 美…韓은 지재권 족쇄 풀고 K-원전 르네상스 주도

Photo Image
새울 3, 4호기 원전 건설 전경. 2016년 착공을 시작한 새울 3호기는 한국형 원전(APR1400)으로 발전 용량은 1천400MW급이다. 원자력안전위원회 제공

2000억달러 규모의 대미 전략투자 프로젝트의 이면에는 '인공지능(AI) 패권 선점을 위한 전력망 확충'이라는 미국의 국가적 아젠다가 자리 잡고 있다. 천문학적인 전력을 24시간 중단 없이 집어삼키는 생성형 AI(인공지능) 급증으로 미국 전역이 유례없는 전력난에 직면하자, 미국 정부가 한국의 막대한 자본과 제조·시공 경쟁력을 끌어들여 전력 인프라 확충에 나선 것이다.

텍사스주 엔시날 가스복합화력 발전소(223억달러·프로젝트 스타)를 양국이 1호 사업으로 확정한 이유기도 하다. 텍사스주는 저렴한 부지와 풍부한 에너지 덕에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AIDC가 가장 빠르게 집결하는 지역이다. 하지만 기존 송배전망으로는 폭증하는 전력 소비(2025~2030년 연평균 13.6% 성장 전망)를 감당하기 어려워 AIDC 구축 자체가 지연되는 병목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텍사스 프로젝트는 총 6.472GW 규모의 발전소를 건설해 인근 AIDC에 송전망을 거치지 않고 전력을 직접 공급(co-located)하는 파격적인 방식으로 설계됐다. 발전 연료비 변동 위험을 데이터센터 입주 기업들이 전액 부담하고 발전소는 설비용량 기준 고정요금을 받는 '톨링(tolling)' 방식 전력구매계약(PPA)을 채택해 안정적 수익 구조를 완성했다. 글로벌 개발사 릴레이티드와 미국 1위 발전운영사 넥스트에라, 가스 생산업체 루이스 에너지가 원팀으로 뭉친 데다 한국 기업들의 발전 기자재·EPC·장기 운영(O&M) 참여와 미국 내 유사 프로젝트에 가스터빈을 공급할 기회까지 명문화됐다.

단기 전력난을 텍사스 가스발전으로 뚫는다면, 중장기 기저부하 전력의 해법은 최대 1200억달러가 투입되는 대형 원전 8기 건설(프로젝트 파워)이 맡는다. 미국은 탄소 배출이 없으면서도 24시간 대규모 전력을 쉼 없이 공급할 수 있는 청정에너지원으로 원전을 지목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2030년까지 대형 원전 10기 착공' 행정명령을 달성하려는 미국의 요구와 세계 최대 원전 시장인 미국을 교두보 삼아 글로벌 원전 수출의 결정적 도약대를 마련하려는 한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물이다.

특히 이번 합의의 최대 성과는 수년간 한국 원전 수출의 발목을 잡아 온 웨스팅하우스(WEC)와의 지식재산권 분쟁을 일거에 매듭짓는 '한미 원전 프레임워크'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양국은 공동 팩트시트를 통해 한국전력과 한국수력원자력, 미국 WEC를 프로젝트 파워의 핵심 서명 주체로 명시했다.

한국 기업들은 WEC의 지분 투자도 한다. WEC 측이 한국의 이사회 진입을 부담스러워하는 점을 감안해 지분율을 10% 미만으로 조율하되, 과거 한국 원전의 제3국 진출을 가로막았던 양국 기업 간 타협협정(SA)을 전면 개정하기로 합의했다. 원천 설계 기술은 쥐고 있지만 시공 및 기자재 공급망 역량을 상실한 WEC와 정해진 기한과 예산 내에 원전을 짓는(On time, On budget) 세계 최고 수준의 엔지니어링·시공(EPC) 역량을 보유한 한국 원전 생태계가 맞물린 '상생 모델'을 확립한 셈이다.

이는 미국 본토를 넘어 전 세계 원전 시장을 양국이 공동으로 석권하기 위한 포석이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국내 기업들은 미국뿐 아니라 서유럽 등 WEC가 영향력을 쥔 제3국 시장 진출까지 염두에 두고 전략적 투자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체코 등 해외 수주전마다 소송전과 갈등으로 얼룩졌던 '한·미 출혈 경쟁'의 고리를 끊어내고, 설계는 WEC가, 시공과 핵심 기자재 공급은 우리 기업이 분담해 글로벌 원전 르네상스 시장을 한미가 원팀으로 주도하는 '공동 수출 밸류체인'을 제도화한 것이다.

미국 본토 건설 물량 자체도 유례없는 규모다. 한국형 차세대 원전인 APR1400 2기를 미국 본토에 역사상 최초로 수출하고, WEC의 AP1000 6기를 러트닉 장관이 언급한 오하이오, 테네시, 사우스캐롤라이나, 켄터키주 등에 건설하는 구상이다. 특히 AP1000 6기 건설에도 국내 시공사와 주기기 부품사들이 대거 투입된다.

한국 원전 산업 생태계로의 조기 자금 환류를 위한 파격적인 조치도 공식화됐다. 한미 양국은 연말까지 100억달러의 선급금을 송금하기로 합의했다. 원자로 용기와 증기발생기, 원자로 냉각재 펌프 등 제작에만 수년이 소요되는 장주기 핵심 기자재를 국내 공급망을 통해 조기 발주·제작하기 위한 선제적 자금 투입이다.


안영국 기자 ang@etnews.com

  • 놓치면 아쉬운 정보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