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재의 패러다임 디자인]〈25〉피터팬 증후군이 먹어 치운 111조 원

기업 현장을 다니다 보면 성공한 대표들에게 공통으로 듣는 묘한 하소연이 있다. 회사를 더 키우는 게 겁이 난다는 고백이다. 매출이 오르고 직원이 늘어나는 것은 기업가로서 가장 보람찬 일이어야 마땅하나, 유독 한국의 기업인들은 성장의 문턱에서 주춤거린다. 이는 단순한 심리적 위축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낡은 기업 규모 분류 체계가 만들어낸 견고한 유리천장이 성장의 의지를 꺾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을 졸업한 중견기업 10곳 중 3곳이 다시 중소기업으로 돌아가기 위해 법인을 쪼개거나 하향 격하를 검토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른바 피터팬 증후군으로 인해 우리 경제에서 매년 증발하는 경제적 가치가 무려 111조 원에 달한다는 연구기관의 분석도 존재한다.

현행 제도에서 중소기업이 업종별 매출 기준인 1,500억~1,800억 원을 넘기거나 자산 총액 5,000억 원을 초과하면 중견기업이 된다. 명칭은 근사하지만 실상은 가혹한 생존 게임의 시작이다. 중소기업일 때 누리던 160여 가지의 지원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를 수십 가지의 새로운 규제가 채운다. 시장에서 이를 규제 절벽이라 부르는 이유다. 중견기업이 되는 순간 R&D 세액 공제율은 최대 25%에서 8~15% 수준으로 급락하며, 가업상속공제 등 경영권 승계 지원에서도 엄격한 기준을 적용받게 된다. 정책금융 이용은 사실상 봉쇄되거나 금리 혜택이 사라져 자금 조달 비용이 급증한다. 어제까지 혁신 유망주로 치켜세우던 기업이 매출액 1원 차이로 하루아침에 모든 지원에서 배제되는 현실이, 혁신보다 현상 유지가 이득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제도적 환경은 기업가들에게 기묘한 창의성을 강요한다. 바로 법인 쪼개기다. 한 울타리 안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하루아침에 서로 다른 회사 소속이 되고, 회사 대표가 여러 개의 명함을 들고 다니는 웃지 못할 일이 규제 때문에 탄생한 것이다.

성장의 패널티는 하청 구조와 사업 확장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매출액이 2,000억~3,000억 원을 넘어가는 순간, 기업은 하도급법상 수급사업자 지위를 상실하여 대기업의 단가 후려치기로부터 법적 보호를 받기 어려워진다. 대기업 구매팀에서 “매출 규모가 2,000억 원이 넘으면 하청업체 리스트에서 제외하겠다”는 눈치를 준다는 현장의 토로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또한, 중소기업 영역으로 지정된 사업을 하던 중 회사가 커지면, 해당 분야에서 신제품을 내놓거나 사업을 확장하는 것조차 중소기업 적합업종 규제에 발목이 잡힌다. 잘하는 사업을 키워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는 대신, 가족 명의의 별도 법인으로 사업을 이어가는 기형적 성장이 일어나는 뼈아픈 배경이다.

우리나라의 기업 분류 기준은 글로벌 스탠다드와 비교해도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다. 일본은 자본금 또는 종업원 수 중 하나만 기준 이하이면 중소기업으로 인정하는 유연한 방식을 채택하여 고용유지를 장려한다. 미국 역시 업종별 특성을 존중하여 수천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기업도 산업군에 따라 중소기업으로 분류하며 성장을 장려한다. 반면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인 대한민국은 중소기업을 정량적 수치 하나로 가두는 낡은 틀을 10년 넘게 유지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단순 매출액 기준으로 기업 등급을 무 자르듯 나누는 방식은 이미 그 유효 수명을 다했다.

문제가 이토록 명확함에도 제도 개편이 더딘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장벽 때문이다.

첫째는 언더독 편향의 정치학이다. 정치권에서 중견기업 지원 강화가 자칫 '큰 기업 편들기'로 비칠까 봐 극도로 몸을 사린다. 표심을 의식한 이분법적 사고가 기업의 성장 사다리를 끊어놓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부처 간 '칸막이 행정'이다. 중소기업은 중소벤처기업부가, 중견기업은 산업통상자원부가 관리하는 구조 속에서 졸업과 진입을 매끄럽게 연결할 컨트롤타워가 부재한 채 각 부처가 자기 영역 지키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셋째는 규모에 따라 혜택을 단계적으로 줄여가는 '슬라이딩 방식 인센티브'의 부재다. 행정 비용을 핑계로 유지되어 온 '모 아니면 도' 식의 불연속적 지원 체계가 기업들을 절벽 아래로 밀어 넣고 있다.

매년 111조 원의 경제적 가치가 사라진다는 사실은 미래의 삼성, 미래의 현대차가 될 싹을 우리 손으로 자르고 있다는 경고다. 이제는 기업 규모라는 낡은 잣대 대신 혁신과 기여를 새로운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매출이 커졌더라도 좋은 일자리를 늘리고 국가 전략 기술에 투자하는 기업이라면 그에 걸맞은 혜택을 지속해서 부여해야 한다. 최근 정부가 졸업 유예기간을 3년에서 5년으로, 상장 기업은 최대 7년까지 늘리는 등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 진통제일 뿐이다.

기업 대표들이 법인 인장을 여러 개 들고 다니며 규제를 피할 궁리에 매몰된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 성공이 곧 규제와 불이익으로 이어지는 낡은 공식을 완전히 깨부수어야 한다.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의 문턱을 거침없이 넘어 글로벌 전문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끊어진 성장 사다리를 온전히 복원하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 경제가이 111조 원의 출혈을 멈추고 도약할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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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재 PD(전 국회사무총장)

이광재 PD(전 국회사무총장)

PD(전 국회사무총장) 이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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