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플러스]“정부 재정지원사업의 역설…교육·연구보다 '계획서 쓰기'가 더 중요해진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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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클립아트코리아

정부의 재정지원사업이 대학 재정 기반을 좌우하는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대학의 핵심 역량이 교육·연구보다 '공모사업 대응력'에 집중되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등록금 동결 장기화와 규제 강화로 자체 수익사업이 어려워진 대학들은 사업계획서 중심의 평가 체계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학 관계자들은 “등록금이 10년 넘게 사실상 동결된 데다, 자율적 수익사업도 각종 규제로 제한돼 정부의 공모사업에 높은 비중을 두지 않으면 운영이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특히 학령인구 감소가 심각한 지방대학일수록 공모사업 의존도가 높은 것이 현실이다.

서울의 한 상위권 대학 관계자는 “연구도 교육도 결국 사업계획서로 증명해야 하는 상황인데, 정부 사업 방향이 바뀔 때마다 계획서를 다시 작성한다”며 “링크 사업에서 라이즈로 전환되는 과정에서도 기준이 바뀌어 시행착오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문서를 잘 만드는 것이 공모사업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현실이 대학의 본연 기능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사립대학 관계자도 “정부기조나 정책이 바뀌면 유사한 사업이어도 달라진 기준이나 용어로 해석이 다를 수 있고 사업계획서나 결과보고서 작성에 적지 않은 시간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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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추진되는 사업에서도 비슷하다. 국가교육위원회가 지난달 공개한 '고등혁신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추진 중인 지역거점국립대 집중육성 선정 기준은 △학사구조 광역화 실적 △기초학문·첨단연구·지역특성 기반 육성 전략 △대학원 경쟁력 강화 전략 △학부 정원 감축 실적 등을 주요 평가 지표로 제시했다. 보고서는 '해당 대학의 자율적 전략 수립을 최대한 존중한다'고 명시했지만 실제로는 정부가 정한 항목 중심으로 대학들은 수십 페이지의 사업계획서를 작성해야 한다.

정책 연구기관에서도 이러한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있다. 고영선 한국교육개발원(KEDI) 원장은 최근 열린 KEDI 교육정책 국제세미나에서 “등록금 동결로 대학 재정이 어려움이 많은 상황에서 사업계획 중심의 사전 심의 평가 체계로는 대학의 질적 혁신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고 원장은 “정부 지원사업의 선정 기준을 상위 1% 또는 10% 논문 실적, 졸업생 취업률, 평균 연봉 등 사후 성과 기반 지표로 전환해야 한다” 며 “계획서를 잘 쓰는 대학이 아니라 성과를 내는 대학이 더 많은 지원을 받는 구조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일본 국립대는 목표 지향형 사업 계획보다 그 동안 이룬 성과를 기준으로 지원금을 배분한다. 특정 목표를 위한 개별 재정지원사업을 축소하고, 대학의 재학생 수·연구 성과·취업실적 등에 연동해 '포괄보조금'을 지급하는 구조다.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을 많이 받고 연구 및 취업 실적이 우수한 대학일수록 지원도 늘어난다.

고 원장은 “국가균형발전이 중요한 가치라면 지방대학에는 일정 배수를 가산해 형평성을 반영할 수 있다”며 “복잡한 심사 절차 없이도 객관적 지표를 중심으로 한 단순하고 투명한 지원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수도권의 한 대학 관계자는 “수많은 재정사업이 있었지만 대학의 연구·교육 역량은 여전히 세계 주요 대학과 비교하면 갈 길이 멀고, 세계에서 한국 대학 순위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며 “행정 부담을 줄이고 대학 본연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도록 재정사업지원체계가 정비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권미현 기자 mhkwo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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