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가난, 전쟁, 분단, 보잘 것 없는 천연자원까지 가진 거라곤 결핍이 전부였던 이른바 '흙수저'였다. 이런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 것은 사람이었다. 없는 살림에도 교육에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며 키워낸 인적자원들이 기술을 발전시키고 경제를 성장시켰다.
특히 제조업에서는 이런 특징이 더욱 두드러졌다. 열악한 주머니 사정에도 미래를 위해 고가 산업 시설과 장비를 구축하려 한 노력도 중요했지만, 이를 국내 환경에 맞게 최적화하고 생산성을 극대화한 것은 결국 과학자와 기술자의 역량이었다.
덕분에 1960년대만 해도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던 한국은 빠른 속도로 성장을 거듭했다. 수출품이라곤 텅스텐 같은 광물과 수산물, 가발이 전부였던 나라가 이제는 세계최고 수준의 3나노 반도체와 이차전지, 자동차와 첨단선박을 수출하는 기술 강국이 됐다.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한국의 경이적인 성장과정은 이제 전 세계 저개발 국가들이 앞다퉈 학습하고 추종하는 롤 모델이 됐다.
한국의 고도성장에서 주목할 또 다른 포인트는 초기 산업화를 주도한 과학기술인들이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농업, 경공업, 중화학공업, 첨단제조기술의 모든 단계를 몸소 경험하고 실현한 과학기술인들의 기술과 경험은 산업현장에서 여전히 큰 가치를 지닌다.
한국 제조업의 핵심 경쟁력인 공정 최적화와 생산성 극대화는 지금도 최신 기계나 설비의 우수성보다 이를 운용하는 인적자원의 노하우가 주요 기반을 이루고 있다.
KIST 한·인도협력센터 책임자로 마주하는 인도 제조업계 현실은 과거 한국과 닮은 점이 많다. 첨단설비 도입 의지는 높다. 하지만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경험과 노하우는 부족하다.
기술 도입과 실제 현장 적용 사이 간극을 메우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선진국 전문가가 최신 기술을 전수해도 개도국 현장에 맞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공정 개발과 인력 배치는 현지 환경에 맞게 조정돼야 한다. 한국 시니어 과학기술자들이 특별한 것은 이런 간극을 메우며 기술 강국으로 발전해온 온 모든 과정을 몸으로 직접 체득했다는 점이다. 특히 제한된 자원으로 최대의 효율을 이끌어내 온 경험은 현재 개도국들이 직면한 문제 해결에 매우 유용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의 시니어 과학기술인들은 대규모 은퇴시기를 맞고 있다. 그간 지혜와 경륜을 살려 제2의 인생을 설계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지만 그간 축적해온 기술경험과 첨단산업 간의 연계성 부족, 높은 인건비 등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개도국으로 시선을 돌린다면 상황은 전혀 다르다. 이들 국가는 발전 단계에 따라 다양한 제조기술이 필요한 까닭에 한국의 고도성장을 이끈 시니어 과학기술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언어와 문화 차이라는 장벽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세계 10대 경제대국 한국의 핵심자원을 이뤄온 과학기술인들에 대한 개도국들의 신뢰와 기대는 이런 장벽들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
시니어 과학기술인의 해외 진출은 한국의 새로운 국제협력 모델 구축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의 사명인 인류보편의 복리증진에도 기여할 수 있는 기회다. 대한민국의 소중한 자산인 시니어 과학기술자들의 지혜와 경륜을 이제 세계와 나눌 때다.
이승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인도협력센터장 leesc@kist.re.kr
김영준 기자 kyj85@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