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플러스]〈칼럼〉경쟁의 본질에 관한 고찰

Photo Image
이은경 교육전문가

아이가 중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농구를 하다 들어온 표정이 심상치 않다. 땀을 쏟은 날은 어김없이 개운한 얼굴이었는데 어째 좀 멍하다. 결국 털어놓기 시작했다.

“오늘 농구 하다가 들었는데 성준이 명의로 아파트가 있는데 그게 20억이래. 걔네 형이랑 누나도 같은 단지에 한 채씩 있대.”

교통사고를 목격한 듯한 몹시 상기된 표정이다. 성준이네 형편이 여러모로 윤택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방에 들어간 아이는 침대에 누워 어떤 생각을 이어갔을까. 아이가 삼킨 말들이 들리는 듯했다.

적어도 나는 점수와 레벨을 외치며 쉴 틈 없이 몰아붙이는 부모는 아니라는 자부심에 취해 있던 시간, 훌쩍 자란 아이의 눈에는 주변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것이다. 왜 우리 애는 수학 진도를 쭉쭉 빼지 못할까, 왜 숙제를 야무지고 꼼꼼하게 챙기지 못할까, 왜 할 일을 미리미리 좀 해두지 않을까를 불만스러웠으면서도 아닌 척했던 가식적인 부모의 시간 동안 아이는 전에 없던 상황을 분명하게 알아챌 만큼 성장한 것이다. 왜 우리 집의 화장실은 하나뿐일까, 왜 우리 아빠 차는 국산일까, 왜 우리 할아버지는 부자가 아닐까, 왜 우리 엄마의 떡볶이는 맛이 없을까.

Photo Image

초등학생의 20%가량이 정규수업 외 하루 4시간 이상 공부한다는 통계를 접했다. 하루 6시간 이상 공부한다는 초등학생도 3%를 넘는다. 성인으로 치면 퇴근 후 추가 업무, 자기 계발에 쓰는 시간으로 볼 수 있겠다. 가능한 일인가, 가능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긴 시간을 정규수업 외의 공부에 쏟는 현실의 이유는 고작 의대 증원이 몰고 온 '의대 열풍' 뿐일까. 전국의 초등학생들이 일제히 의대라는 유일한 목표를 향하고 있을 리 없고, 의대를 강요하는 일부 부모의 사례를 일반화할 의도도 아니다.

교육평론가 박성수님의 저서 '대한민국에서 학부모로 산다는 것'의 서문은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축구 공화국을 만들기 위해 '허벅지 굵기 측정'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난 평가 기준을 세우고 온 국민이 자녀의 두꺼운 허벅지를 목표로 온갖 사교육은 물론 해외 훈련까지 감내하지만 축구 성적은 정작 개선되지 않는다. 이 경쟁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를 잊고, 주변에서 허벅지 두께 경쟁을 시작하자 일단 뛰어든다. 무엇을 위한 노력인지 본질을 잊은 채 모두가 선행 진도를 위해 달리니 시작은 하고 보자, 라는 마음으로 이제 막 구구단을 이해하기 시작한 아이를 일으켜 다음 진도를 들이미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어느 날 아이가 불쑥 왜 내 명의의 아파트가 없냐고, 친구들 모두 가지고 있던데 그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따져 묻는다면 이 물정 모르고 감사한 줄 모르는 망나니 놈을 어째야 하나 고민에 빠질 부모들에게 묻고 싶다. 별일 없이 학교를 마치고 늦지 않게 돌아온 아이가 그 존재만으로 얼마나 감사하고 귀한 존재인지는 알고 있느냐고, 싫은 마음을 눌러가며 매일 저녁 해내는 공부는 아이의 성장을 위함이 확실하냐고, 혹시 무엇을 위함인지 모를 허벅지 두께를 위한 것은 아니냐고 말이다.

이은경 교육전문가

◆이은경 교육전문가 =15년간 초등 교사로 활동. 현재 부모교육전문가, 저술가, 강연가, 유튜버 등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이은경쌤의 초등어휘일력 365' '초등매일 글쓰기의 힘' '초등 자기주도 공부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