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지난 4일(현지시간) 국가 표준 전략을 담은 ‘핵심 신흥 기술’(Critical and Emerging Technology) 보고서를 발표했다. 반도체. 인공지능(AI), 바이오 등 첨단산업에서 국제표준을 선점해 우위를 차지하는 한편 중국을 비롯한 경쟁국을 견제하기 위한 청사진을 담았다.
그동안 민간 중심 표준 정책을 유지한 미국 정부가 국가 차원 중장기 전략을 공개한 것은 이례적이다. 강력한 정부 지원 아래 차세대 이동통신, 이차전지 등에서 잇달아 국제표준을 확보한 중국에 대응해 맞불을 놓은 것으로 풀이된다. 글로벌 표준 전쟁이 서막이 올랐다.
진종욱 국가기술표준원 원장은 세계 각국에서 한층 치열한 표준 경쟁이 벌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붕괴한 공급망이 빠르게 재편되고, AI, 차세대 모빌리티 등 첨단 기술이 상용화하기 시작하면서 ‘표준’이 산업 주도권을 좌우할 핵심 가치로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진 원장은 국제표준 시장에서 우리나라 위상을 높이는 데 모든 힘을 쏟겠다고 강조했다. 세계 각국으로 퍼진 자국우선주의·보호무역주의로 좁아진 한국 기업들의 수출길을 넓히기 위해 국표원이 믿음직한 첨병 역할을 하겠다고 역설했다.
대담=양종석 정치정책부 부장
-지난 2월 국표원 원장으로 부임했다.
▲벌서 100일이 훌쩍 지났다. 취임 이후 바쁘고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국내 기업들의 수출 활성화를 위한 정책적 지원에 주력했다.
불안정한 국제 정세 등에 따라 우리나라 수출이 지난 10월부터 올해 4월까지 7개월 연속 감소했다. 대통령께서도 정부가 수출 영업사원 자세로 기업과 ‘원팀’이 돼야 한다고 누차 강조했다. 이를 위해 적극적 수출지원을 국정운영 중요 과제로 제시했다.
국표원은 현재 수출기업의 해외인증을 지원한다. 수출기업들이 겪는 애로 중 하나는 해외인증이다. 한국산 제품을 해외에 공급하기 위해서는 현지에서 다양한 인증을 받아야 한다.
이에 따라 해외인증에 소요되는 시간·비용을 줄이는 정책적 노력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원내 ‘해외인증지원단’을 신설해 조직적·체계적 지원에 나섰다.
각국 기술규제 애로 해소에도 힘을 쏟고 있다. 최근 기술 패권과 자국우선주의에 따라 다양한 기술규제가 선진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등장하고 있다. 국표원은 직접적 양자협의와 다자간 협력으로 기술 애로를 해소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또 AI, 탄소중립 등 디지털·에너지대전환 시대를 준비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신기술에 대한 국제표준 선점은 우리나라 기업의 핵심역량을 높여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국내 기업 수출 확대를 돕기 위해 어떤 지원을 하고 있나
▲세계 각국은 자국민 안전과 환경보호 등을 목적으로 다양한 인증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EU의 CE, 중국의 CCC 인증이 대표 사례다. 이 같은 인증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무역금융, 마케팅과 함께 수출기업들의 3대 애로로 꼽힌다.
KOTRA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수출기업 상담 2만7000여건 가운데 약 20%(5300여건)가 인증 ·규격 관련 애로로 나타났다. 이는 23%(6300여건)를 기록한 바이어 발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규모였다.
정부는 수출기업의 해외인증 관련 어려움 해소를 지원하기 위해 국내 시험인증기관과 해외기관과의 상호인정 범위를 확대하겠다. 주요 수출국을 대상으로 전기·전자, 의료기기, 생활용품 등 기업 수요를 반영할 예정이다.
국내 기관에서 해외인증을 대행하거나 시험성적서를 발급하면 시험 시료의 해외 발송에 따른 비용과 소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이는 수출기업의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 지난 4월 ‘해외인증지원단’을 발족했다. 부처·기관별로 산재한 해외인증 관련 정보를 통합해 원스톱으로 제공하는 한편 수출 지원기관,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개최하는 수출기업 설명회에서 1대 1 상담부스를 운영하는 등 현장 중심 지원활동을 강화할 예정이다. 실제 해외인증을 신청하거나 진행 중인 기업을 대상으로 심층 기술자문을 수행하는 등 수출 단계에 최적화한 맞춤형 지원을 추진할 것이다.
국표원은 불합리한 해외기술 규제에 대해 해외 규제당국과 다자·양자 협상으로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155건 협상으로 국제표준과 다른 인증기준, 수입제품 차별, 과도한 요구사항 등으로 인한 우리나라 기업의 애로 60건을 해소했다.
예컨대 우즈베키스탄은 지난해 12월 수입 가전제품의 에너지효율 규제강화를 유예기간 없이 시행했다. 이에 따라 300억원 규모 한국산 가전제품 수출이 중단될 수 있었다. 국표원은 올해 3월 우즈베키스탄 에너지부를 방문해 수입·내수 제품 간 차별 완화와 시행유예를 요청했다. 우즈베키스탄 측은 규제 개정 절차에 착수하고, 개정 시까지 한국 기업 수출제품 통관을 재개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중국을 필두로 세계 각국이 표준 경쟁에 나서고 있다.
▲미국은 그동안 국가·경제 안보와 관련된 핵심 신기술 목록을 발표해 왔다. 이번에 핵심 신기술에 대한 국가 표준전략을 백악관에서 직접 발표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미 정부는 8대 핵심기술과 6대 응용 분야를 선정해 해당 분야 표준 개발에 집중하겠다고 명시했다. 국제표준 개발 과정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내용도 담았다. 이는 표준이 핵심 신기술에 대한 주도권 확보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앞으로 국제표준화 무대에서 국가 간 경쟁이 한층 더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 현재 국제표준화 시장에서 총 124개국 중에서 8위에 올라 있다. 앞으로 국제표준 시장에서 우리나라의 영향력을 한층 높이기 위한 활동을 추진할 계획이다.
특히 국제표준을 선도하는 미국·독일과 전략적 협력관계를 확대하겠다.
미 표준화기구(ANSI)와 오는 8월 개최하는 ‘제3차 한-미 표준협력대화 및 표준포럼’에서 AI, 자율주행 등 핵심 신기술 분야 협력을 추진한다. 양국 표준정책을 공유·논의를 위해 정부기관간 협의체를 신설할 방침이다.
독일과는 올해 12월 열리는 ‘제3차 한-독 표준협력대화 및 표준 콘퍼런스’에서 이차전지, 스마트 제조, 미래차 분야 협력을 강화할 예정이다.
-AI 등 차세대 기술에 대한 국가표준 개발 방향을 설명해달라.
▲국표원은 국가표준정책을 총괄·조정한다. 국제표준기구(ISO),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등에서 우리나라 정부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차세대 신기술에 대한 표준화는 5년마다 수립하는 국가표준기본계획을 기반으로 차근차근 추진하고 있다.
먼저 표준의 수요자인 기업을 비롯해 다양한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표준화 포럼을 구성해 준화 전략 수립과 표준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AI, 자율주행, 탄소중립 녹색성장 등 차세대 신기술과 관련한 11개 포럼을 운용하고 있다. 향후 초격차 프로젝트, 미국의 국가 표준전략에 따른 핵심기술 분야 등 새로운 수요 대응을 위한 포럼을 신설할 계획이다.
이 같은 활동을 통해 첨단 기술과 관련한 국제표준을 제안하고 있다. 특히 양자기술 분야에서는 우리나라가 국제표준 제·개정을 위한 기술위원회 신설을 주도하고 있다. 표준과 국가 연구개발(R&D) 사업을 연계해 개발한 표준안을 국제·국가표준으로 제정해 신기술의 사업화도 촉진한다.
특히 산업대전환을 위해 중점 추진하고 있는 ‘초격차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산업 전반을 대상으로 R&D 전 과정에서 표준화 로드맵 수립, 표준화 동향 조사 등을 지원한다. 이후 결과물로 도출된 표준안에 대한 국가표준 제정도 뒷받침할 방침이다.
표준개발을 위한 정부 부처 간 협업 강화에도 힘을 쏟고 있다. 차세대 기술에는 다양한 융복합 기술들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자율주행차에는 자동차, 통신, 교통제어시스템 등 다양한 분야 기술이 활용된다. 국표원이 표준안 개발 과정에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며 정부 부처들의 참여와 협력을 이끌어 내고 있다.
-조성환 현대모비스 대표가 지난해 한국 최초로 ISO 회장에 선출됐다.
▲ISO는 세계 최대 국제표준화기구다. 전기전자(IEC), 통신(ITU)을 제외한 기계, 화학, 조선, 자동차 등 다양한 영역에서 표준화를 추진한다. 표준을 통한 지속가능 발전, 기후 변화 위기대응 등세계적으로 중요한 표준을 개발하면서 국제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조성환 대표가 이 같은 국제표준화기구 수장으로 선출된 것은 국제표준 시장에서 한국의 위상이 한 단계 높아진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ISO 회장은 ISO를 대표해 총회, 이사회 등 정책 결정을 위한 모든 회의에 참여한다. 국표원은 ISO 회장의 직무수행과 공약이행 지원을 위해 지난 2월 ‘국제표준화기구 전략대응팀’을 신설했다. 회장의 공약인 국제표준을 통한 글로벌 위기 대응, 표준보급 촉진, 표준화 교육 강화 등을 지원할 예정이다.
또 국제표준화 주요 회의에 우리나라 기업과 전문가 참여 확대를 추진하겠다. 국제표준 제·개정은 기술위원회와 작업반 회의에서 진행된다. 위원회와 작업반의 의장·간사는 논의 안건 선정, 조율 등 위원회를 실질적으로 운영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총 251명의 의장·간사를 배출했다. 오는 2027년까지 25명을 추가할 계획이다. 특히 양자기술, 반도체 등 미래 유망산업 분야에서 신설되는 기술위원회와 작업반 의장, 간사 등 수임을 적극 추진하겠다. ISO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 임원 수임과 IEC 이사회 및 표준관리이사회 등 중요한 정책위원회 임원 수임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국제표준화 전문가 양성에도 힘을 쏟겠다. 신산업 기술 분야 석·박사급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한편 기업 임직원을 대상으로 표준 교육을 실시할 계획이다. 이로써 국제표준 시장에서 한국의 경쟁력을 한층 높이는 것은 물론 국제표준화기구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겠다.
-‘제품안전관리’도 국표원의 핵심 업무다.
▲국표원은 국민 안전에 중요한 전기용품·생활용품·어린이용품 등 제품 안전관리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제품으로 인한 사고 방지 등을 위해 시장 출시 이전 단계에서 안전인증 등으로 안전성을 확인하고 있다. 시장 유통 단계에서 제품에 대한 안전기준 충족 여부를 확인하는 안전성 조사와 결과에 따른 리콜제도를 비롯해 소비자 사용 단계에서 제품으로 인한 안전사고 조사도 실시한다.
국표원은 지난달 향후 3년간(2023~2025년) 제품안전 정책방향을 결정하는 ‘제5차 제품안전관리계획’을 발표했다. 온라인 구매 확대 등 달라진 제품 유통 환경과 융복합 등 제품 출시 트렌드를 반영해 소비자 안전을 강화하고, 불필요한 기업 부담은 완화하는 데 집중했다. 이를 발판으로 국민 안전을 보호하는 조치를 한층 철저하게 시행할 계획이다.
또 AI, 사물인터넷(IoT) 등 융복합 신기술 적용 제품이 출시되는 제품 안전 환경을 고려해 국내외 시장의 신제품 출시를 지원하는 것은 물론 신속하게 안전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국표원은 지난해 11월 이동형 전기차 충전기 신제품에 ‘KC’ 안전기준을 도입했다. 오는 10월까지 ‘사용후 전지’ 재사용 시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법적 기반을 마련, 안전성 검사제도를 시행할 예정이다.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를 들려달라.
▲단기적으로는 우리나라 기업들의 수출 회복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 스포츠 경기도 단기전에는 팀의 모든 역량을 쏟아붓는다. 국표원은 관계부처 및 산·학·연 등과 협력하고 해외인증기관과 상호인정을 확대하는 등 가능한 모든 역량을 동원해 수출 활성화에 가시적 성과를 내도록 노력하겠다.
장기적으로는 기술패권경쟁 시대의 미래를 준비하겠다.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이기도 했던 ‘성즉명’(誠卽明, 정성스러우면 미래를 볼 수 있다)이라는 말처럼 기술 패러다임에 대한 고도의 분석을 바탕으로 창의적 전략과 정교한 로드맵을 수립하겠다. 주변국과 우호적 협력 관계 구축 등으로 신기술 표준에서도 국가 위상을 높이고 글로벌 리더십을 확보하도록 착실히 준비하겠다.
○…진종욱 원장은
진종욱 원장은 부산 동아고와 연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1994년 기술고시 29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공직 생활 중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국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연세대에서 기술정책협동과정 박사를 수료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산업기술정책과장, 국가기술표준원 적합성정책국장, 경제자유구역기획단장, 무역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두루 거쳤다. 지난 2월 국가기술표준원 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국가 표준 정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윤희석 기자 pionee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