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적 진리를 탐구하고, 사랑의 마음을 지닌 인간다운 인격과 품격을 가르친다.”
광운의 교육이념을 말하는 조선영 학교법인 광운학원 이사장 목소리는 나지막하지만 분명했다.
“어느 분야 교육도 마찬가지이지만 과학기술 교육의 대상은 인간이다. 인간이 아무리 진선진미한 과학기술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인간다운 품격이 깃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과학기술을 함양하기에 앞서 사랑의 마음을 길러 간직해야 할 것이다.”
광운학원 설립자인 화도 조광운 박사의 연설문이다. 조 이사장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마다 설립자가 남긴 연설문을 반복적으로 읽는다고 말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구절이 눈에 들어오고, 기존에 읽었던 문장에서도 색다른 의미를 찾게 된다고 전했다.
5월 20일은 광운대를 포함한 학교법인 광운학원 개교 89주년 기념일이다. 인천 출신 조광운 설립자는 일제강점기 민족을 구하기 위해 청년에게 과학기술과 새로운 문물을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 신념으로 1934년 조선무선강습소를 설립했다.
이는 해방 이후 학교법인 광운학원 모태가 된다. 특히 광운대는 국내 대학 최초로 전자공학과를 설립했다. 우리나라 정보통신기술(ICT) 인재 산실로 불린다.
조 이사장은 내년 설립 90주년을 앞두고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인 푸른나무재단과 협업으로 청소년폭력 예방 캠페인 및 기금모금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광운학원이 당대 민족 자립 방안을 청년 실용교육에서 찾았듯, 학교폭력과 사이버폭력 근절을 위한 실질적 대책마련에 집중할 계획이다.
조 이사장은 “모든 과학기술 교육의 대상이 인간이라고 말했던 설립자 말씀을 되새기면서 창학 90주년, 나아가 100주년 기념사업이 단순 기념건물 건립이나 행사에 그쳐서는 안된다”며 “대한민국 교육기관으로서 책임의식을 갖고 학교가 가진 역량을 키워나가겠다”고 밝혔다.
대담=김원석 통신미디어부 부국장
-이사장 취임 전과 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운영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21세기 교육환경에 사립학교법, 고등교육법 같은 법이 존재한다는데 매번 놀라고 있다. 낡은 제도의 철창(Iron cage)같은 규제 속에서 창학정신을 유지하며 어렵게 학교를 운영해 오신 선임 이사장님들께 존경을 표한다.
이사장은 교육자 보다 경영자에 가깝다. 영리를 추구하지 않는 비영리 기업의 경영자 역할이다. 어느 조직이든 생존과 성장에는 위기와 기회가 공존한다. 리더로서 고민이 있거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마다 설립자가 남긴 연설문을 읽고 또 읽는다. 지금보다 더 어려운 시절에도 학교 생존과 성장을 늘 고민했고, 위기와 보람을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사장으로서 광운이 지속적으로 생존하고,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광운의 모든 학교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하는 게 사명이다.
-이사장으로서 특별히 보람된 일이 있다면.
▲2019년 광운 설립자 화도 조광운 선생 전기를 편찬한 일이다.
1980년 설립자 타계 이후 많은 분들이 광운공과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는 데 노력했다. 특히 부친은 광운공대 부학장, 학장, 이사장을 역임하시며 개인 재산 거의 전부를 대학 교지와 교사 확보를 위해 기증, 종합대학 발판을 다지셨다. 광운대는 1987년 단과대 시절을 마무리하고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후 비약적 성장을 했다.
안타까운 것은 15년간의 임시이사체제로 잃어버린 세월이다. 1997년 ‘의결정족수부족’을 사유로 교육부에 잔여 이사 충원을 요청했었는데, 교육부 직권으로 정이사 모두를 해임하고 전원 임시이사를 파견했다. 그렇게 시작된 임시이사체제가 장기화되면서 광운 전체가 제3자에게 매각될뻔한 위기를 수 차례 겪었다.
임시이사들의 관리소홀로 법인자산도 송두리째 날아가고 사고법인이 됐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고 억울할 일이다. 이러한 수많은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고 광운 캠퍼스를 지키고 설립자 일대기를 그린 책을 만들었던 게 가장 보람된 일이다.
-다양한 사회현안에 관심이 많으신 듯 하다.
▲광운 교육이념이자 미션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실용적 진리를 탐구하려면 변화하는 사회에서 학생들이 빠르고 올바른 방법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배움의 방식을 끊임없이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으로는 빠른 변화가 어렵다. 사립학교에서 다양한 시도를 해 볼수 있어야 한다. 국내에는 실력 있는 에듀테크 스타트업이 많다. 그런 스타트업과 학교 교사가 현장에서 협업해야 한다. 서로 소통하고 배우고 업데이트하고 학생들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줘야 한다. 이 같은 혁신을 가로 막는 규제와 법은 단순 개정이 아니라 과감히 폐지해야 한다. 정부 중심의 중앙집권화된 교육시스템에서는 변화가 생길수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다. 사랑의 마음을 지닌 인간다운 인격과 품격을 기르는 교육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빠르고 월등하게 발전해 왔다. 하지만 우리 사회와 아이들은 우울감, 자살 충동, 왕따, 갑질과 편가르기 문화, 마약 등 여러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교사,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 정부, 민간기업 등 모두가 협업해 해결해야 한다. 한마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고 정교하게, 그리고 신중하게 접근하고 풀어가야 할 문제다.
-학교폭력 근절에 집중하는 계기가 있는지.
▲폭력은 어떤 형태로든 결코 허용돼선 안된다. 미국에서는 ‘불링(Bullying)’이라는 오래된 표현이 있다.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고, 학교에서만 일어나는 문제도 아니다. 세계적 현상이다. 어느 집단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글로벌한 사회적 문제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에서 일년에 두 번씩 실시하는 설문조사를 보면 미국에서도 청소년들이 자살시도 또는 자살충동을 느끼는 빈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는 미국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모든 정부 부처, 학교, 민간 단체가 협력해 신중하게 해결해야 한다.
-높은 사교육비 부담 등 교육문제 해결 방안에 대한 생각은.
▲입학전형 시스템 평준화, 사립학교를 묶어두는 사립학교법 모두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억제해 결국 의미없는 경쟁을 만들고 있다.
제도나 형태중심 개혁이 아닌 내용중심 개혁이 요구된다. 현장 교사와 교수, 학생을 비롯한 다양한 관련 집단간 충분한 토론에 기반한 점진적이고 자발적 개혁이 필요하다. 소수 관료와 정치인에 의해 중앙집권적으로 결정되는 의사결정방식은 멈춰야 한다.
예를 들면 수능시험을 일년에 딱 한번 보는 것도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다. 수많은 변수가 있는데 학생에게 단 하루에 모든 것을 결정짓도록 하고 있다. 직장인, 스타트업 대표에게도 다양한 도전 기회를 장려한다. 수험생에게는 단 한 번밖에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가혹하고 합리적이지 않다. 제로 베이스에서 고민해야 한다.
-대학의 위기를 해결하려면.
▲규제 중심 규정과 법은 과감하게 폐지하고 학교도 글로벌화 할 수 있도록 자율을 줘야 된다. 기업과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은 수십년 전 과거와 비교해 변한 게 없다. 사립학교법과 고등교육법이 대표적이다.
사립학교법은 세계에 한국, 일본, 대만 3개국에만 있다. 우리나라 사립학교법은 일제식민지 시절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사학에 관의 개입을 정당화하고 사학 자주성을 위축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일본 사학규제 법제를 그대로 옮겨 만든 것이 시초다. 대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일본과 대만의 사립학교법 내용을 들여다보면 우리나라만큼 규제를 하지 않는다. 그 두 나라는 계속해서 규제를 없애는 쪽으로 개정을 해 온 반면, 우리나라는 반대였다.
학교도 경영이 필요한 비영리 조직이다. 이사장 역할은 경영자 역할과 같다. 미국에서도 사립대는 각주의 법인설립법(incorporation laws)으로 허가한다.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코넬, 브라운대 등 대부분 사립대 법인을 ‘corporation’이라고 표현한다. 우리와 똑같이 사립학교법을 운용하는 일본도 학교법인을 ‘corporation’ ‘educational corporation’ ‘school corporation’으로 사용한다.
우리나라만 유일하게 학교법인을 재단(foundation)으로 구분해 규제한다. 사립학교법에 따라 사학법인에 재단전입금 형태로 산하 교육기관에 지속적으로 자금을 제공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한국은 선진국은 물론 사립학교법을 운용하는 3개 국가와 비교해도 가장 규제가 심하다. 일단 정착한 제도는 심각한 문제가 있더라도 장기적으로 유지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제도 자체가 확고하게 정착해 문제의식이 약하다. 이제 사립학교법을 넘어 국립대학법 제정까지 논의하는 상황이다. 제로베이스 생각이 필요하다.
-미래 인재양성을 위한 제언을 해준다면.
▲정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정책이나 사업에 동조하는 대학에만 상당한 금액을 보조하거나 지원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시대에 정부가 정해준 기준만으로 학생, 교수, 교직원을 선발하게 된다. 정부 규제와 감시가 두려워서 혁신이나 아주 작은 변화에도 부정적이고 소극적 자세가 될 수 있다.
정해진 기준에 맞추다보면 학교별 특성은 뒷전이 된다. 더 나은 방식이나 효율성은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체계에서 혁신은 일어날 수 없다.
교육기관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과나 경쟁력 창출이 목적도, 존재 이유도, 사명도 아니다. 국가사회 지식은 물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데 끊임없이 노력하고 투자해야 한다.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시도가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실패 과정에서 발견된 새로운 시도가 망설임 없이 도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무수히 많은 기회를 주면서 장기적으로 지속되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육이다. 그 교육 자체가 교육기관 존재 이유이며 사명이다.
○조선영 광운학원 이사장은
광운학원 설립자인 화도 조광운 박사의 손녀다.
2001년 6월 미국 카네기멜론대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대 어바나-샴페인캠퍼스에서 경제정책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경영대학원에서 조직이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연세대 대학원 경영연구소, KPMG 컨설팅 등에서 근무했다.
2016년 10월부터 광운학원 이사로 선임돼 상임이사로 재직했다. 2018년 5월 제13대 광운학원 이사장에 취임했다. 교육개혁자문위원회 대학혁신분과 위원, 교육부 글로컬대학위원회 위원, 한국청소년단체협의회 자문위원, 그리고 조광운 박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화도기념사업회 이사장도 겸직하고 있다.
조 이사장은 교육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바탕으로 학교폭력 및 사이버폭력 근절에 앞장서고 있다.
김명희 기자 noprint@etnews.com, 김민수 기자 ms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