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본격 참전했다.
EU는 18일(현지시간) 총 430억유로(약 62조원)를 투입, 유럽지역 반도체 산업 육성을 골자로 한 '반도체법'(Chips Act) 시행에 합의했다.
EU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와 27개국을 대표하는 이사회, 유럽 의회 등 3자 협의가 최종 타결된 것이다. 향후 유럽의회와 이사회 표결이 남았지만 사실상 시행 관문을 넘은 것으로 풀이된다.
EU는 반도체법 시행으로 현재 전 세계 생산량 대비 9%에 불과한 유럽의 점유율을 오는 2030년까지 20%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연구개발(R&D), 설계, 제조 등 반도체 공급망을 전방위 지원하기로 했다.
애초 EU는 첨단 반도체만 지원 대상으로 삼으려 했지만 세부 내용 협의 과정에서 범용 반도체(성숙 공정)도 포함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유럽 반도체 기업 다수가 성숙 공정 중심임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EU는 법안이 본격 시행되면 미국처럼 반도체 기업 유치전을 전개할 것으로 관측된다. 유럽의 반도체 생산 비중을 높이려면 제조 시설을 다수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유치 대상이자 수혜 기업은 인텔이다. 인텔은 지난해 3월 유럽 반도체 생산과 R&D에 10년 동안 800억유로(115조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오는 2027년 가동을 목표로 올해 독일 중부 마그데부르크에 공장을 설립한다. 아일랜드 내 반도체 생산시설을 확장하는 한편 이탈리아에도 후공정 공장을 마련할 계획이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유럽 투자 계획 발표 당시 “전 세계 반도체 생산량의 80%가 아시아에서 생산된다”며 반도체 지역 편중을 우려한 바 있다. 인텔이 유럽에 진출하면 EU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을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 전통 강자인 유럽 시장을 겨냥한 차량용 반도체 기업도 반도체법의 지원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에는 NXP(네덜란드), 인피니언(독일),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스위스) 등 유수의 반도체 기업이 포진해 있다. 이들 기업은 차량용 반도체 생산 능력을 기르기 위해 공장 증설을 추진하고 있다. 기존 8인치 중심인 생산 체제를 12인치로 전환하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이들 기업이 EU 반도체법으로 보조금을 받으면 투자 비용 절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국내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으로 분석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EU 반도체법안에는 역외 기업에 대한 명시적 차별 조항이 포함되어 있지 않고, 현재 우리나라 기업의 생산시설이 EU에 위치하고 있지 않아 직접적 영향은 적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과 EU가 강력한 보조금 정책으로 자국 내 반도체를 육성하고 공급망을 재편하려는 시도는 국내 반도체 산업에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반도체 제조 역량이 강화될 경우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해야 하고, 미국이나 EU가 첨단 반도체 제조를 위해 삼성전자나 TSMC를 유치하게 되면 국내 투자 여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인 TSMC는 유럽에 반도체 공장 건설을 검토하고 있다. 독일이 유력해 보이는 가운데 전기차와 자율주행차로 진화하고 있는 자동차 산업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