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 공장 멈추고 인력 감축
피해 견디며 수출재개 기다려
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현지에 진출한 우리나라 기업들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 공장 가동 중단에 이어 일부 기업은 직원 감원까지 시행했다. 국내 기업들은 현지 공장과 법인을 완전히 철수시키는 것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 러시아와 동유럽 시장을 포기할 수 없는 이들은 누적되는 피해를 묵묵히 견디며 종전 소식과 수출 재개만을 기다리고 있다.
◇삼성·LG 등 전자업체 수출 재개 '스탠바이'만 일 년 째
삼성전자 공식 온라인 유통채널 '러시아 삼성닷컴'에는 현재 구매 가능한 전자제품이 거의 없다. 사이트에 지난해 출시된 스마트폰과 TV 등 제품이 올라와 있긴 하지만, 자세히 보기 위해 클릭하면 '이 제품은 현재 구매할 수 없습니다'라는 표기가 나온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제품·부품 선적이 중단됐고, 러시아 칼루가주 보르시노에 TV·모니터 생산공장을 두고 있는 삼성전자는 작년 초 재고마저 소진되자 가동을 중단했다. 이에 따라 현지 유통채널은 지난해 상반기까지 남아있던 재고를 판매하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팔 물건이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한때 러시아에서 1위였던 삼성전자 스마트폰 점유율은 0%로 떨어졌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물류 차질과 미국의 제재 가능성을 감안해 출하를 전면 중단하며 점유율이 사라졌다. 삼성전자의 빈자리는 러시아 시장을 삼분 하던 중국 샤오미와 화웨이 등이 차지했다.
러시아에서 세탁기·냉장고 등 주요 가전 분야 1위를 차지했던 LG전자도 지난해 3월 제품 공급을, 같은 해 8월 공장 가동을 멈췄다. 모스크바주 루자시에 위치한 LG전자 공장과 법인에는 약 8000억원이 투입됐다.
전쟁 장기화에 따른 물류 차질과 수출 중단으로 러시아 공장·법인이 멈춰선 지 1년이 다되가고 있다. 전자업체들은 종전되더라도 재진입이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현지 법인을 운영하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전략물자관리원에 수출 재개를 위한 절차를 확인하고 종전만 되면 즉시 시행할 수 있도록 '스탠바이' 상태다.
전자업체에게 러시아 생산시설은 현지 매출을 위한 것도 있지만 인근 독립국가연합(CIS) 등으로 향하는 제품도 만드는 곳이기 때문에 더 중요한 기지다. 수 십년 동안 공을 들여 러시아 국민브랜드로 자리매김한 삼성·LG로선 '철수'라는 선택지가 아예 없다.
◇현대차, 러시아 공장 가동중단에 이어 감원까지 '비상'
현대차 러시아 공장은 전쟁 장기화와 공급망 대란 여파에 따른 생산 감소로 최근 감원에 착수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자리한 현대차 생산법인은 생산 중단이 이어지는 데 따라 러시아에서 인력 최적화 단계에 들어갔다고 발표했다. 다만 감원 규모가 얼마나 될지는 밝히지 않았다.
러시아 공장은 생산 규모가 연간 20만대 정도다. 2600여명이 현대차와 기아 차량을 생산해왔다. 2011년부터 현지 맞춤형 모델인 쏠라리스, 글로벌 소형 SUV 크레타, 기아 리오 등이 생산됐다. 이 공장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지난해 3월부터 가동을 중단했다. 재개 시점은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가동이 중단된 공장은 2200여명이 유급 휴무 상태에 있다.
현대차는 지난해 말 현지 직원들에게 “회사가 글로벌 공급망 차질로 초래된 부품 공급 중단으로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왔다”면서 “올해가 끝나가지만 지금도 여전히 공급망 복원이나 생산 재개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감원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고용계약 파기 문서 서명이 올해 1월 16일부터 2월 3일까지 이뤄지고, 퇴사는 1월 23일부터 2월 17일까지 진행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대차가 공시한 보고서에 따르면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은 지난해 1분기 29억3200만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철강·석화업체 직격탄…정기보수 일정 조정·수입처 다변화 등 대응
석유화학업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직격탄을 맞았다. 채산성과 수익성이 동시 악화했다. 석유화학사들은 나프타를 열분해(NCC)해 에틸렌을 생산하는데, 수익성과 직결되는 에틸렌 스프레드가 급격히 하락했다. 에틸렌 스프레드는 에틸렌 가격에서 나프타 가격을 제한 것으로 통상 톤당 300달러를 손익분기점으로 본다. 하지만 에틸렌 스프레드는 전쟁이 시작된 후 지난해 4월 통상 손익 분기점인 톤당 300달러를 밑돌았고, 연말에는 100~200달러대를 오갔다.
이는 세계 1위 천연가스 생산국 러시아에 대한 잇단 수출 제재로 국제 유가가 동반 상승했고, 원유를 정제해 만드는 나프타 가격을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기 위축에 따른 석유제품 수요 둔화까지 겹쳤다.
국내 석유화학사들은 정기보수를 앞당기고 기간을 연장하는 조치를 내렸다. 에틸렌을 생산할수록 손해기 때문이다. 실제 LG화학과 롯데케미칼에 이어 국내 3위인 여천NCC는 지난해 12월 종료 예정이던 37만톤 규모 정기보수를 이달까지 2개월 연장했다. LG화학은 지난해 말 118만톤 규모 여수 NCC 공장 정기보수를 마쳤다.
타격을 받은 것은 국내 철강업계도 마찬가지다. 러시아, 우크라이나와 교역하는 철강 제품 비중은 크지 않지만, 글로벌 경기 둔화 여파에 따른 철강 수요 둔화 영향을 받았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연간 조강 생산량은 6565만4000톤으로 전년 7041만9000톤 대비 6.8% 감소했다. 생산량 감소폭은 하반기 들어 더욱 커졌다. 지난해 8월까지 한 자릿수였던 생산량 감소율은 9월 15.3%, 10월 11.1%, 11월 17.6%, 12월 11.7%로 확대됐다. 철강사들은 러시아산 수입 비중이 약 12%에 이르는 스크랩(원료)에 대해서는 수입처를 다변화해 대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함봉균기자 hbkone@etnews.com, 류태웅기자 bigheroryu@etnews.com, 정치연기자 chiye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