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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대통령이 1980년 3월 18일 충남 대덕전문연구단지를 순시,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뭘 어떻게 해야 하나?” 한국 과학기술의 메카인 대덕전문연구단지(현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도 10·26이라는 격랑 속에서 한동안 개점휴업 상태였다. 갈피를 잡지 못해 길을 잃은 나그네 처지와 흡사했다. 그러다 최규하 대통령이 1980년 1월 25일 과학기술처 연두순시에서 “대덕연구소 등 많은 연구소에 대한 관리 운영 효율화 대책을 강구하고 연구소 간 상호 협조로 중복연구가 없도록 하라”고 지시하자 대덕전문연구단지는 과학기술 강국을 향한 발걸음을 다시 시작했다.

연구단지에는 1978년 4월 한국표준연구소(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를 시작으로 한국원자력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 한국화학연구소(현 한국화학연구원),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현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가 차례로 입주했다. 교육기관으로는 충남대가 1978년 8월 이주했다. 기업부설 연구소 가운데에는 쌍용중앙연구소(현 쌍용양회기술연구소)가 가장 빠른 1979년 3월, 뒤를 이어 럭키중앙연구소(현 LG화학기술연구원)가 12월에 둥지를 틀었다.

단지 내 기반 시설 공사는 기관별로 업무를 분담해서 추진했다. 도로는 건설교통부와 한국토지공사가, 전력은 한국전력공사, 통신은 체신부 산하 전무국(현 KT), 용수는 대전시와 한국수자원공사, 하천은 대전시, 학교는 교육부가 각각 담당했다. 업무 총괄은 과학기술처가 맡았다.

1980년 3월 18일. 충남 대덕전문연구단지관리사무소에는 오전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날 오후 최규하 대통령 순시를 앞두고 사무소는 최종 업무보고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청와대 경호실에서 나온 경호원들이 사방을 엄중하게 통제했다. 출입자들은 사전에 신원조회를 했고, 출입 시 철저한 몸수색을 받았다.

이날 오후 3시경. 최규하 대통령이 탄 검은색 승용차가 경호 차량의 안내를 받으며 대덕관리사무소 현관 앞에 도착했다. 최 대통령은 서정만 소장의 안내로 곧장 관리사무소 회의실로 들어갔다. 순시에는 성좌경 과학기술처 장관과 최광수 비서실장 등이 수행했다. 최 대통령은 충남도청을 연두순시하고 귀경길에 대덕전문연구단지를 순시한 것이다.

성 장관의 인사말에 이어 서 소장이 연구단지 건설과 입주한 연구소 현황을 보고했다. 최 대통령은 업무보고 후 “연구단지 조성에 차질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당부한 뒤 서 소장 등 관계자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노고를 격려했다.

최 대통령은 이어 성 장관의 안내로 대덕1호 입주 연구기관인 한국표준연구소, 한국화학연구소 등을 순시했다. 최 대통령은 표준연구소에서 김재관 소장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았다. 김 소장은 보고 후 최 대통령에게 건의 사항을 말했다. “각하, 전국에서 전화로 표준시간을 알려주는 특수번호를 확보하고 필요한 시설을 갖추려면 5억원의 예산이 필요합니다.” 최 대통령이 즉시 관계자에게 해결을 지시했다. “전화시보는 국민에 대한 서비스인 만큼 올해 안에 예산을 확보해서 필요한 시설을 갖출 수 있도록 방안을 검토하세요.”

그해 5월. 사방에 라일락 향기가 그윽했지만 정국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5월 15일 서울역 대규모 시위와 5월 17일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 5·18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정국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5월 27일 오후 4시. 정부는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가 주재하는 국무회의에서 대통령 소속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설치령'을 의결했다. 정부는 5월 31일 대통령령 제9897호로 이를 공고하고 국보위를 정식 출범시켰다. 최 대통령이 의장인 국보위는 대통령을 보좌하고 국책사항을 심의하며 국무총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내무·외무·법무·국방·문교·문화공보부 장관, 중앙정보부장, 대통령 비서실장, 계엄사령관, 합참의장, 각군 참모총장, 국군보안사령관과 대통령이 임명하는 10명 이내 위원으로 구성됐다. 국보위는 상임위원회를 설치하고 상임위에 분과위원회를 두기로 했다.

국보위 상임위원장직은 전두환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부장서리가 맡았다. 국보위는 6월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 중앙교육연구원 청사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현판식을 가졌다. 국보위는 모두 13개 분과위원회를 설치했다. 운영위원회, 법제사법위원회, 외무위원회, 내무위원회, 재무위원회, 경제과학위원회, 문교공보위원회, 농수산위원회, 상공자원위원회, 보건사회위원회, 교통체신위원회, 건설위원회, 사회정화위원회 등이다. 분과위는 분야별 소관 사항에 대한 기획·조정 업무를 관장했다.

국보위가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자 권력의 중심은 순식간에 청와대에서 국보위로 옮겨갔다. 이 가운데 경제과학분과위는 경제기획원, 과학기술처, 경제과학심의회(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업무를 관장했다. 분과위는 위원장, 위원, 전문위원, 행정요원 등으로 구성했다. 경제과학분과위원장에는 김재익 전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이 임명됐다. 당시 국장급 분과위원장 임명은 파격이었다. 그는 분과위원장 1순위가 아니었다. 1순위는 조순 서울대 교수였다.

국보위 출범에 깊이 관여한 권정달 당시 국보위 입법위원의 생전 증언. “경제과학위원장은 내 육사 시절 교관인 조순 서울대 교수를 영입하라고 했다. 내가 두 차례나 점심 식사를 대접하며 도와달라며 부탁했지만 당시 '서울대 분위기가 좋지 않다'며 끝내 사양했다. 그래서 김재익 기획국장을 경과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김재익 국장은 경기 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에 수석 합격했다. 학구열이 강해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하와이 주립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스탠퍼드대에서 통계학 석사와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해 한국은행에 복직했다가 청와대 파견근무를 거쳐 1974년 남덕우 부총리 비서실장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976년 3월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으로 발탁됐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의 회고. “내가 1968년 스탠퍼드대 대학원 초청으로 그곳에 갔더니 김재익이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의 실력은 출중했다. 그곳 학생이나 교수들로부터 '한국의 천재'라고 높이 평가했다. 몇 년 후 그가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나를 찾아왔기에 그를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으로 발령 내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정부 직제에 기획국장 자리는 행정고시에 합격한 사람만 임명할 수 있어서 그를 내 비서실장으로 채용해 경제정책 수립에 관해 많은 의견을 들었다. 나는 관료 조직의 폐쇄성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으로 심흥선 총무처 장관을 만나 설득했다. 심 장관이 내 부탁을 받아들여 기획국장에 별정직 공무원도 임명할 수 있게 직제를 개정했고, 그를 기획국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청렴하고 강직한 공무원이었고, 경제이론에 대한 논쟁에서 누구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경제개발의 길목에서)

김 국장은 당시 심각한 전화 적체 해소를 위해 전자교환기 개발사업을 추진했다. 이 사업은 막대한 이권이 걸린 일이었다. 그로 인해 수많은 협박, 회유, 모략 등에 시달렸다. 김재익 전 대통령 경제수석의 부인인 이순자 전 숙명여대 교수의 회고록 증언. “그는 1976년 기계식 전화를 전자식으로 바꾸는 일을 추진했다. 이 일을 하면서 협박과 회유, 모략 등 여러 시련을 겪었다. 그는 모략과 구설에 올랐고, 나중에는 협박도 받았다. 심지어 집으로 협박 전화가 와서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세력의 압박에도 굽히지 않고 전자식 교환기 일을 밀고 나갔다.”(시대의 선각자 김재익)

김 국장은 국보위 출범 이전인 1980년 5월 관료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 경제기획원에 사표를 제출했다. 사표가 수리되자 그는 몹시 기뻐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그날 오후 경제부총리를 통해 국보위에 참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그는 이튿날 마음을 단단히 먹고 국보위를 찾아가 당시 전두환 상임위원장에게 “저는 이미 경제기획원을 그만두었고, 또 건강이 좋지 않아서 여기서 일하기가 어렵습니다”라고 간곡하게 고사했다. 그러나 전두환 위원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보위 관계자도 “그런 건 상관없으니 월요일부터 출근하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과정을 거쳐 국보위 경제과학분과위원장직을 맡았다.


전두환 위원장과의 만남은 그에게 운명적이었다. 그 만남이 그에게 '별의 순간'이 된 것이다. 김재익 박사는 이후 전두환 위원장의 경제가정교사를 거쳐 5공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에 임명됐다. 그는 '5공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며 통신혁명, 물가 안정, 전자산업 육성, 반도체 개발 등 많은 경제정책을 전두환 대통령의 절대 신임 아래 적극 추진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