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영구적 위기와 정부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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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영국의 대표 사전 가운데 하나인 콜린스는 '영구적 위기'(Permacrisis)를 2022년 단어로 선정했다. 이 단어는 'Permanent'(영구적)와 'Crisis'(위기)의 합성어로, '장기간에 걸친 불안정과 불안'을 의미한다. 코로나19에 이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경제 위기, 기상이변 등 복합 불안 요인은 세계를 통제할 수 없는 영구적 위기 상황으로 만들었다.

영구적 위기로 세계는 사분오열 상태다. 각 나라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파편화·블록화됐다.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이 정치·외교·안보·경제 등 전방위로 확대됐고, 유럽과 일본마저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에너지 확보를 노골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내수보다 수출 중심으로 경제 성장을 해 왔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자국 이기주의는 우리 경제 발전에 큰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다. 영구적 위기와 자국 이기주의라는 험난한 파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내 기업을 보호하면서도 압도적인 기술 초격차를 이끌 수 있는 정부 역할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세 가지 역할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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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기초 체력을 기르게 해 주는 역할이다. 위기 상황에서도 국가 경제를 유지할 수 있는 기초적인 힘을 기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인력·자본·규제 혁신이 필요하다. 미래 신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양질의 인력 공급이 필수다. 첨단 산업 분야에서 선두 경쟁에 뛰어든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관리 등 산업 현장의 수요를 반영한 맞춤형 고급 인재 양성이 시급하다. 기업에 자본이 차질 없이 흘러가도록 투자를 부양시키는 역할도 중요하다. 국가 전체 연구개발(R&D)의 약 30%를 차지하는 정부 R&D가 민간 R&D를 이끌도록 과감하고도 적절한 자본 투자가 필요하다. 규제 혁신도 빼놓을 수 없다. 신산업 기술 발전을 방해하는 규제를 찾아 신속하게 해결하면서 기업의 적극적 투자와 원활한 사업 진행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둘째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역할이다. 국가 경제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불확실성과 변동성을 가장 낮은 수준으로 관리하면서 기업의 사업 추진과 관련한 예측 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우리는 몇 년에 걸쳐 글로벌 팬데믹과 이에 따른 봉쇄 사태를 겪으면서 비용이 조금 더 들더라도 신뢰할 수 있는 공급망 구축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생산과 기술 발전이 원활하게 이뤄지려면 특정 국가에 대한 공급 의존도를 줄이고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노력이 시급하다. 특히 주요 소재·부품과 핵심 광물에 대해서는 시장 변화와 기술 동향을 늘 파악하고 능동적으로 관리해야 할 것이다. 글로벌 기술 시대에 독자적인 기술 자립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기술 파트너를 선제적으로 확보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전략적인 국제기술 협력으로 기술 동맹의 우군을 만들고, 대체 공급망 연결 고리로도 활용해야 한다.

셋째 공격적 산업 정책 추진이다. 경제와 안보 이슈가 엉켜 있을 때는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라 해도 혼자서는 풀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때 정부 차원의 개입과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국가첨단전략산업특별법'은 우리나라 경제 성장판을 여는 중요한 산업 부흥책이 될 것이다. 이 법은 우리나라가 글로벌 첨단 산업 공급망에서 핵심 지위를 확보하고, 지속적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2022년에 제정됐다.

구체적으로 첨단 산업의 기술 초격차와 추격 발전을 촉진하고, 이를 위한 기술 혁신과 인력 양성, 기업 투자를 전방위로 지원하는 한편 첨단 산업기술에 대한 보호 조치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는 지난해 11월 반도체, 이차전지, 디스플레이 등 3개 산업 15개 첨단전략기술을 우선 지정한 후 첨단산업 특화단지와 특성화 대학 지정 등 후속 조치를 하고 있다.

국가첨단전략산업지원단으로 지정된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은 국가첨단전략기술의 지정·변경·해제·판정하는 사무를 포함해 첨단산업 육성을 위한 정책 수립, 신속한 규제 개선, 첨단산업 특화단지 및 특성화 대학 지정과 육성, 조세특례제한법 상 세액공제 심의 등 사무를 총괄 수행한다. 올해 상반기에는 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와 특성화대학원 선정 작업 등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특화단지로 지정되면 인·허가와 등록 등 각종 민원에 대한 신속 처리가 가능해지고 기반 인프라 구축 비용이나 세제 지원을 받을 수 있어 관련 기업은 물론 산업 대전환을 꾀하는 지방자치단체의 관심이 뜨겁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가 지난해 말 세계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약 44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0%는 '지금 변화하지 않으면 10년 이내에 기업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답했다. 이것은 PwC가 설문 조사를 시작한 2011년 이래 가장 비관적인 응답률이다.

국제 사회가 철저히 자국 이익 중심으로 재편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처한 경제 환경은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실정이다. 이 같은 '영구적 위기' 시대에 우리가 믿고 나갈 수 있는 것은 기술 혁신뿐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좌고우면하고 망설일 시간이 없다. 첨단 산업에 관한 기술 주도권은 한 번 놓치면 회복이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은 강력한 산업 부흥을 표방하는 정부 기조에 맞춰 경제 발전과 기술 혁신을 위한 모든 노력을 할 방침이다. 기업 역시 지금의 투자와 노력이 10년 후 시장에서 기업의 위치를 결정한다는 마음으로 과감히 기술 혁신에 뛰어들어야 한다. 정부와 기업이 각자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서 현재의 영구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기술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계기로 만들 수 있길 바란다.

민병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bjmin@kiat.or.kr

〈필자〉

민병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은 전문 과학기술인으로 시작해 국회의원, 이후 기관장까지 선임된 인사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정치, 정책 분야까지 확장했다.

민 원장은 1959년생으로 이화여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이 대학 대학원을 수료했다. 일본 규슈대에서 핵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일본원자력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1991년 한국원자력연구소 최초의 여성 유치 과학자로 입소했다.

이후 20년 간 국내 원자력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1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회장과 한국원자력학회장도 역임했다. 지난해 9월부터 KIAT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민간주도 성장 전략을 뒷받침할 정책을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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