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또 다른 상생의 시작 '납품대금 연동제'

'납품대금 연동제'는 원재료 가격 상승분을 납품대금에 반영해서 수탁사의 부담을 덜어주는 제도다. 일반 국민에게는 다소 생소하겠지만 중소기업의 오랜 숙원이었다. 지난 2008년 국제 원자재 가격 급등에 따라 도입이 검토됐지만 당시 법제화에 실패했다. 이후 납품단가 조정협의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유명무실했다. 협의 요건도 까다롭고 국내 거래환경 속에서 위탁사에 당당하게 가격조정 협상을 요청할 수탁사는 없기 때문이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조정협의제에 단가 인상을 요구하는 순간 사업은 접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소연했다.

지난 5월 장관으로 부임한 후 납품대금 연동제 도입에 착수하자마자 수많은 반대와 난관에 직면했었다. 그 중 가장 큰 저항은 정부의 지나친 시장개입이라는 대기업의 목소리였다. 6월에 있었던 납품대금 연동제 TF 첫 회의에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싸늘한 냉기와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십수 년간 진척이 없었던 일이기에 이번에도 오래지 않아 좌초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기류도 흘렀다.

하지만 벤처기업을 창업해서 20년간 운영해왔던 기업인으로서, 그리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으로서 불공정거래를 근절하고 상생을 통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선진국을 넘어 선도국으로 가는 해법이라는 소신으로 대기업과 관련 부처를 설득하기 위해 발로 뛰었다. 압축성장의 근현대사 속에서 앞만 보고 혼자 가기에도 바쁜 시절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대기업이 국가 경제에 기여한 바도 무척 크다. 하지만 이제는 주위를 돌아보며 함께 가야 더 멀리갈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수많은 협의와 의견수렴, 설득의 과정을 거쳐 8월 1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납품대금 연동제 브리핑을 직접 진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9월 14일에는 최초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모두 모여 납품대금 연동제 협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위탁기업 41개사, 수탁기업 294개사가 시범 운영에 참여하기로 했다. 예상을 넘어서는 수치였다. 협약식에서 대기업, 중소기업 대표들은 손을 모아 잡고 연동제의 안착을 다짐했고 중기부 장관으로서 모든 협약서에 일일이 정성을 담아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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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서울 서초구 KT우면연구센터에서 열린 납품대금 연동제 자율추진 협약식에서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앞줄 왼쪽에서 11번째)과 참석자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가능의 영역으로 옮기는 데 14년이 걸렸다. 설마 되겠느냐는 불신과 의혹의 시선들이 이제는 희망의 눈빛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느끼고 있다. 국회에서도 여야를 넘어 한 목소리로 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고 해를 넘기지 않는다는 목표로 입법을 추진하고 있을 만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하나의 큰 산을 넘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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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범운영 기간 동안 안정된 제도 정착을 위해 현장의 사례들을 연구·분석해서 업종별, 원재료별로 조정 요건, 기준 지표, 산식 등 세부 내용들을 보완해 나갈 것이다. 동시에 연동 약정의 모범 사례를 발굴해서 적극 홍보할 계획이다. 참여 기업에 대한 지원 강화도 검토 중이다. 아직 제도에 익숙하지 않은 기업들에는 시범사업 내용을 공유하고 참여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예정이며 특히 연동제 참여기업들에 대해서는 관계 부처와 협의해 각종 인센티브를 확대하는 등 정책적 지원을 진행하려 한다.

시범사업에 병행해서 국회와 상호 공조하며 시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법제화 방안도 모색 중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과제는 원재료 가격 상승의 부담을 기꺼이 함께 짊어지는 상생의 거래문화를 안착시키는 일이다. 상생이란 디딤돌 위에서 서로 지지하며 함께 성장하는 대한민국을 꿈꾸면서 중소벤처기업부는 335개 기업이라는 든든한 동반자와 다음 산을 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함께 해준 모든 대·중소기업인들께 감사를 전한다.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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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 벤처기업을 창업한 기업인 출신 장관이다. 1969년생으로 서문여고와 광운대 수학과를 졸업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수학과 석사, 수리과학과 박사를 취득했다. 2000년 디지털 보안 솔루션 업체 '테르텐'을 창업하고, IT·보안 전문가로서 활동했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제9대 한국여성벤처협회장과 제29대 한국무역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기관 활동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이후 2020년 제21대 총선에서 현 국민의힘 전신인 미래한국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의정활동을 펼치다 윤석열 정부 초대 중기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벤처기업 창업자 출신 전문가로서 중소·벤처기업 재도약과 벤처 생태계 혁신을 주도할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 납품대금 연동제는

수탁·위탁거래에서 물품 등의 제조, 공사, 가공, 수리, 용역 또는 기술개발에 사용할 주요 원재료 가격이 일정 기준 이상 변동하는 경우 그 변동분에 연동해 주기적으로 납품대금(납품단가 포함)을 조정하는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