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대학에서 전자기학이라는 과목을 가르친다. 이 과목은 대부분의 전기·전자 계열 학과에서 전공필수 과목으로 지정돼 있다. 전자기 에너지의 발생·저장·전송·응용에 대한 기본 원리를 배우지 않고서 해당 졸업장을 받을 수는 없다.
반면에 전자기학은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전공과목 가운데 하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자기 현상을 난해한 물리학과 수학을 기반으로 해석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학기 초반에 열심히 공부하던 학생도 어려운 개념이 나오기 시작하면 금세 흥미를 잃는다. 전기·전자 계열을 전공한 전자신문 독자라면 전자기학 시험 전날에 끙끙거리며 머리를 감싸고 고생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학생들이 종종 질문한다. '전자기학에서 배운 수식들을 회사에서도 사용하나요?' 사실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하면 책상에 앉아서 수학문제를 풀 일은 별로 없다. 대학원에 진학하더라도 전자기 이론이나 수치해석 분야를 전공하지 않는 한 복잡한 수식을 다루는 경우가 드물다. 주로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 툴(tool)을 사용해서 연구개발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해석하고자 하는 시스템 또는 소자를 시뮬레이션 툴에 모델링하면 컴퓨터가 알아서 해석해 준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시뮬레이션 툴은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잘 구성돼 있어서 처음 접하는 사람도 쉽게 해석 대상을 모델링하고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병렬처리, 클라우드 컴퓨팅, 적응형 격자기법 등 소프트웨어 기술의 발달로 최신 전자기 시뮬레이션 툴은 전투기나 인공위성과 같은 거대 구조의 무선통신 성능을 빠르게 예측할 수 있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 가상세계 모델링 및 메타버스, 디지털 트윈에 대한 기대와 함께 시뮬레이션 툴 시장의 연평균 성장률은 2030년까지 13.5%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바야흐로 툴 만능시대다. 이론은 몰라도 툴을 사용하면 결과값을 쉽게 도출할 수 있다. 결과 값이 왜 이렇게 나왔는지 알 필요가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블랙박스 툴이 다 해결해 준다. 유사한 예로 요즘 유행하는 심층학습(딥러닝) 기술을 들 수 있다. 인터넷에서 다운로드 받은 오픈소스 딥러닝 코드가 어떻게 짜였는지 몰라도 매뉴얼대로 학습시키고 파라미터를 조정하면 어렵지 않게 영상이나 음성을 인식하고 분류할 수 있다.
그래서 고민이 된다. 고리타분한 이론을 가르치기보다 툴 사용법을 가르치는 것이 학생들에게 더 이롭지 않을까? 취직하는 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채용자 입장에서도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툴을 이용해서 프로젝트를 수행한 경험을 좋게 평가할 것이다.
하지만 이론을 기반으로 한 사고(思考) 없이 툴에만 의존하는 연구개발에는 한계가 있다. 현상의 원인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가 축적돼야 기저에 깔린 이치를 이해할 수 있고, 나무가 아닌 숲을 볼 수 있게 된다. 연구개발의 방향성 설정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큰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고, 이는 문제의 원인과 해결 방안을 계속적으로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가능하다. 실제로 지도한 학생 가운데 온갖 단축키와 컴퓨팅 스킬을 바탕으로 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학생보다 탄탄한 이론적 지식과 끊임없이 원인을 파악하고자 하는 자세에 있는 학생이 더 우수한 결과를 도출하는 경우를 많이 봐 왔다. 전자는 툴의 사용이 목적인 반면에 후자는 툴이 원인 탐구의 수단이었다.
창의공학적인 사고를 방해하는 툴 만능주의를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시뮬레이션 툴의 결과 값을 맹신해서 연구개발 프로젝트가 방향성을 잃고 데이터를 조작하는 범죄가 야기되기도 한다. 소프트웨어 기술 발달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 간 차이가 많이 좁혀졌더라도 그 모든 것을 반영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툴의 계산 값을 참고하되 실제 실험을 통한 검증이 필요하며, 계산 값과 실험 값에 차이가 나는 이유에 대한 탐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최근 소프트웨어 만능주의에 대해 경각심을 고취하는 칼럼이 많이 게재되고, 특강이 개최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윌리엄 브래그는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해석하는 새로운 사고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연구개발 과정도 끊임없이 새로운 사고를 하고자 노력할 때 재미가 있고, 그 결과물 또한 우수하다. 학생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사고하는 자세를 익힐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육자의 역할이 아닐까 한다. 툴은 말 그대로 도구일 뿐 이를 다루는 사람이 더 중요한 법이다.
정재영 서울과학기술대 전기정보공학과 교수·한국전자파학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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