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술이 시장에서 빛 발하도록 정부가 혁신의 새로운 길 열어야...
'적기조례'(赤旗條例·Red Flag Act).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절 제정된 세계 최초의 교통법(Locomotive Act)이다. 그런데 자동차를 위한 법이 아니라 당시 신산업인 증기 자동차 출현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 마차 업자의 항의가 들끓자 제정된 법이다. 마차 사업을 보호하고 마부들의 일자리를 지키려는 조치였다. 이 법은 붉은 깃발을 든 신호수가 자동차 앞 50m에서 걸어가며 마차나 말이 접근할 때 신호를 보내야 했다. 자동차 역시 사람이 걷는 속도로 움직여야 했고, 자동차 최고 속도를 말보다 느리게 규제했다. 마차보다 느린 자동차. 1865년에 제정돼 30여년 동안 유지된 이 규제 때문에 영국은 자동차를 가장 먼저 만들고도 자동차 산업 주도권을 독일, 미국, 프랑스에 내주고야 말았다.
150여년이 지난 오늘 여러 도전적인 국내 업체가 실외 자율주행 로봇으로 배송 서비스를 하고 있다. 물론 규제 샌드박스 실증 특례를 통해서만 가능한 서비스이다. 그런데 실외 자율주행 로봇은 현행법상 자동차로 분류돼 운전자가 있어야 한다. 명색이 자율 주행 로봇인데 로봇 한 대에 운전면허를 가진 사람이 로봇과 함께 이동하고 있어야 한다. 또 도로교통법상 보도·횡단보도·공원 출입이 불가하다. 외부 환경을 인식하는 카메라 기반 자율주행도 개인정보 보호법상 위법이다. 이처럼 자율주행 로봇 규제만 하더라도 행정안전부,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통부, 경찰청 등 여러 부처에 걸쳐 있는 법을 해결해야만 새로운 비즈니스가 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는 위기이기도 했지만 비대면 서비스가 활성화하면서 세계적으로 자율주행을 기반으로 서비스 로봇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으니 산업적으로는 큰 기회였다. 최근 국내에서도 기존 로봇업체뿐만 아니라 자동차·전자·통신·IT 업계를 대표하는 대기업이 일상생활 보조에서부터 헬스케어·물류·서빙·배달·방역까지 다양한 로봇 서비스를 내놓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시장 수요가 커지고 혁신적 신제품이 나와도 법적 근거, 안전 기준·표준이 없어 서비스 단계에서 어려움이 있거나 관련법의 이해 상충으로 인한 규제가 시장 출시, 나아가 신산업 창출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업부는 국무조정실, 관계부처, 한국로봇산업진흥원과 연계해 규제 샌드박스 실증 특례 및 '로봇산업 선제적 규제혁신 로드맵'(2020년 10월)을 통해 관련 규제를 단계적으로 개선하고 있다. 개선 대표 사례는 '실내 이송 로봇의 승강기 탑승 허용'이다. 로봇의 승강기 탑승을 위해 '로봇 승강기 안전성 평가 방법'을 KS고시(2021년 11월 산업부)를 해서 로봇 자체의 안전성 평가 기준을 마련했고, '승강기 안전 부품 안전기준 및 승강기 안전기준'을 개정(2021년 12월 행안부)해서 로봇의 무선통신 등 제어시스템에 대한 안전기준을 제정했다.
협동로봇은 안전펜스(울타리) 설치 없이 작업자와 함께 현장 사용이 가능하도록 충돌 방지 기준을 마련(2021년 12월 산업부), 이를 토대로 협동로봇 설치 작업장 안전인증을 제3자 인증 및 자기적합성 선언이 모두 가능하도록 고용노동부의 유권해석을 도출했다. 그 외 항만운송관련사업 등록기준을 개정해 수중청소로봇의 선박하부 청소업이 가능케 했으며, 로봇의 개인정보 수집 이용 및 보호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규제 개선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2019년 로봇 분야 규제 샌드박스 제도가 도입된 이래 실외 배송, 실외 순찰, 주차, 원격재활, 수중 청소, 이동식 충전 등 다양한 분야에서 로봇 관련 실증 특례 20여건이 진행되고 있다. 로봇의 보도 통행 및 주행 데이터 확보 관련 특례가 가장 많은 상황이다. 규제 특구를 통해 이동식 충전로봇(제주), 이동식 협동로봇(대구)에 대해 지자체와 함께 규제 개선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이와 함께 산업부는 로봇진흥원을 사무국으로 하여 '로봇산업 선제적 규제혁신 로드맵 2.0' 수립을 위한 '로봇산업 규제혁신 포럼'을 운영하고 있다. 100여명의 산·학·연·관 전문가로 구성된 포럼 운영을 통해 자율주행, 웨어러블, 협동로봇, 안전로봇의 4대 신규 트렌드 중심으로 기존과제를 재검토하고 신규 과제를 발굴하는 등 로드맵 2.0을 수립할 예정이다. 로드맵 1.0에서 발굴된 33개 기존 과제에 대해서는 추진현황 점검과 규제개선 시점을 조정한다. 로봇 활용 신규 사업 분야에 따라 기존 법령과 부합하지 않거나 법적 공백이 발생한 부분에 대해서는 규제개선 과제를 추가로 발굴, 올해 안에 공표할 예정으로 추진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국정과제로 제시하고 있는 '덩어리 규제'(다부처, 법령이 얽혀 있어 복잡하고 기업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는 규제) 개선과 '포괄적 네거티브 방식의 규제 전환' 등 정의 규제개선 방향과 궤를 맞춰서 산업 전반의 규제 개선 방향을 재조정하고 보완해 나갈 중요한 타이밍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처 간 유기적인 협력을 끌어낼 강력한 범부처 컨트롤타워 작동이 필요하다. 또 민·관 협동 합심이 중요하다. 이번에도 역시나가 아니라 이번에는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진 골든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새로운 기술과 비즈니스 변화의 속도는 늘 법이나 제도 개선보다 빠르다. 지난달 한국로봇산업협회에서 주관한 민간 주도의 자율주행로봇 규제개혁을 위한 발대식이 있었다. 모 호텔의 비바체 룸에서 개최되었는데 '비바체'(vivace)는 '아주 빠르게' 연주하라는 뜻이다. 새로운 시장은 혁신 속도가 관건이다. 민간 기술이 시장에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혁신의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게 정부의 역할이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손웅희 한국로봇산업진흥원장 shon@kiria.org
손웅희 한국로봇산업진흥원장은….
1990년 한국생산기술연구원에 입사하여 30년 넘게 근무했다. 로봇기술본부장·국가산업융합지원센터소장·미래산업전략본부장·융합생산기술연구소장·부원장 등 연구원의 주요 보직과 한양대 겸임교수 및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UST) 교수를 역임한 지능형로봇과 모빌리티, 융합기술과 산업정책 전문가이다. 지난해 4월 한국로봇산업진흥원 5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현재 산업 대전환을 위한 로봇산업 고도화를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