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톡]자동차 제조사의 생존 조건

“유럽에서 강력한 배출가스 규정이 시행되면 현대차·기아는 1조원대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벌금을 내야 한다.” 2년 전 유럽연합(EU)이 2021년부터 유럽에서 판매하는 신차의 평균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당 95g으로 제한한다고 밝히자 다수의 글로벌 시장조사기관은 이같이 경고했다.

이들의 예측은 빗나갔다. 짧은 시간에 현대차·기아는 전기차 판매를 폭발적으로 늘렸고, 작년 탄소배출 저감 면에서 유럽 내 최상위권 자동차 제조사로 거듭났다. 2021년 현대차의 유럽 내 신차 평균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89.8g/㎞, 기아는 91.9g/㎞를 각각 기록했다. 전년보다 15% 이상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였다. EU가 신차에 제시한 평균 이산화탄소 기준치 95g/㎞를 충족하는 기록이자 유럽 최대 제조사인 폭스바겐, 푸조 등을 앞서는 결과다.

내연기관 시대 강자이던 유럽 프리미엄 자동차 제조사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지난해 100g/㎞ 이상의 평균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기록한 메르세데스-벤츠, BMW, 볼보 등은 최근 전기차를 쏟아내며 배출량 줄이기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다.

앞으로 내연기관 자동차에 대한 퇴출 압박은 더 거세진다. EU가 제시하는 사실상 마지막 배출가스 기준이 될 '유로 7'가 발표를 앞뒀다. 2025년으로 예상되는 유로 7 도입안이 확정되면 자동차 제조사들은 지금보다 더 엄격해진 측정 환경에서 배출가스를 4배 이상 줄여야 한다. 지난해 7월 EU는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1990년 대비 55% 수준으로 감축하는 입법안을 담은 '핏 포(Fit for) 55'를 발표하면서 2035년부터 내연기관 신차 출시를 아예 금지하는 내용을 포함했다. 유럽에 이어 세계 최대 시장으로 꼽히는 중국, 미국 등의 상황도 비슷하다.

현대차·기아가 빠른 전동화 전환 전략으로 유럽 내 탄소배출 저감 최상위권 제조사가 됐지만 계속 승자로 남을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내연기관의 종말을 앞두고 주요 제조사들이 전기차 개발과 완전한 생산 전환을 위해 막대한 자금력과 기술력을 쏟아붓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남으려면 과감하게 연구개발(R&D) 비용을 늘려야 한다. 현대차·기아의 2020년 기준 매출 대비 R&D 투자 비중은 2.9%로 글로벌 주요 제조사 가운데 10위권 밖이다. 반면에 폭스바겐이나 벤츠, BMW 등은 매출의 6% 이상을 R&D에 투자하며 기술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유럽에서 벌금을 내야 하던 위기에서 탄소배출 저감 최상위권으로 올라선 사례처럼 한국 자동차가 미래차 시대를 주도하길 바란다. 정부도 규제보단 충전 인프라 구축이나 R&D 세제 지원 등 인센티브 위주 정책으로 산업 발전에 힘을 싣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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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연기자 chiyeo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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