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희 박사는 1968년 3월 말부터 '조사 보고서' 작성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조사 보고서는 한국 전자공업 미래가 걸린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고민과 열정을 생각하면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김 박사는 주말도 없이 날마다 오전 1시가 지나 연구실을 나섰다. 김 박사는 앞서 정부에 인력 지원을 부탁했다. 보고서 작성을 혼자 감당할 수 없어서다. 정부는 윤정우 상공부 계장을 미국에 파견했다. 서울대 공대 전기과를 졸업한 윤 계장은 1967년 9월 김 박사가 정부 초청으로 귀국해 최초 보고서를 작성할 때 그를 도운 인연이 있었다. 두 사람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윤 계장은 1월부터 6월까지 6개월간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 숙소에 머물면서 보고서 작성 업무를 지원했다. 김 박사는 당시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유명 과학자 27명에게 보고서 작성에 필요한 자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윤 계장은 낮에는 김 박사 연구실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숙소로 퇴근했다. 주말에는 김 박사집으로 가서 김치와 된장찌개로 식사를 같이했다.
윤정우 전 전자정보인클럽회장의 증언. “당시 김 박사는 강행군으로 인해 아침마다 코피를 쏟았다고 합니다. 김 박사 부인이 저한테 '저렇게 일하다 큰일나겠다'며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김 박사는 개의치 않았어요. 한국 전자공업 육성을 위한 김 박사의 열정과 의지는 대단했습니다. 김 박사는 제게 전자공업 육성에 관해 많은 가르침을 주셨어요.”
김 박사는 윤 계장과 같이 세계 처음 수출자유지역으로 조성한 푸에르토리코 수도인 산후안과 아일랜드의 섀넌 자유무역지역을 돌아봤다. 수출자유지역에서 조립 또는 생산된 제품은 모두 비관세 혜택을 받고 수출되고 있었다. 조지아주가 조성한 과학기술단지를 방문해 산학 협동 체제에 관한 시책과 적용 프로그램도 소개받았다. 김 박사는 수출자유지역과 과학단지 조성에 관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이는 국내 수출자유지역과 과학단지를 조성하는 계기가 됐다.
1968년 6월 28일. 강행군 끝에 김완희 박사는 '전자공업 진흥방안 조사 보고서'를 완성했다.보고서 분량은 1000쪽에 달했다. 김 박사는 이를 5권으로 분철(分綴)했다. 그해 7월 8일 김 박사는 대통령 최종 보고를 위해 한국에 도착해 서울 워커힐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보고서는 영문이어서 국내 교수 25명이 나눠 한글로 번역을 했다. 번역한 내용은 7명의 전문가가 차트 작업을 했다. 이 작업을 했던 윤정우 회장의 증언. “번역은 오현위 박사(전 전자신문 발행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오 박사는 당시 대한전자공학회장이었습니다. 공학회원 중 영어에 능통한 교수들이 번역을 했습니다. 보고서는 대형 차트로 작성했습니다.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전 상공부 장관과 차관에게 사전에 내용을 보고했습니다, 처음 보고서 차트는 160페이지에 달했습니다. 이를 절반으로 줄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
차트 분량이 방대하자 이철승 차관이 “내용을 절반으로 줄여라”라고 상공부 관계자에게 지시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본 김 박사가 이 차관에게 말했다. “대통령께 보고는 내가 하는데 왜 이 차관이 분량을 줄인단 말이요.” 이 차관은 김 박사의 경기고 후배였다. “선배님. 절대 오해하지 마십시오. 분량이 너무 많으면 선배님이 브리핑하기가 힘듭니다. 제가 분량을 절반으로 줄여도 선배님이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빠지지 않게 하겠습니다.”
이 차관은 김 박사가 강조한 핵심 내용을 모두 반영하면서도 분량을 절반으로 줄여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며칠 후인 7월 15일 오전. 대통령 비서실에서 김 박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김 박사님, 대통령께서 오후 1시 반께 청와대로 오시랍니다.” 이날 오후 1시 30분. 김 박사가 비서진 안내로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 대통령이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각하, 간단히 보고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김 박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 보고 싶어 불렀소.”
박 대통령은 이날 저녁 김 박사를 위한 환영회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는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과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소장, 신동식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등이 참석했다. 보고 차트를 작성하는 며칠 동안 김 박사는 길전식 국회 상공위원장을 비롯한 국회의원들을 만났다. 김 박사는 이들에게 해외 전자공업 실태를 설명하고 한국에서 전자산업 육성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김 박사는 또 청와대가 마련한 일정에 따라 경제계 대표들과도 만나 전자산업 투자를 권했다. 그 당시 만난 경제계 인사들은 박두병 상공회의소 회장, 구인회 금성사 회장,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정재호 삼호방직 회장, 조정훈 한진그룹 회장,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 설경동 대한전선 회장, 서정귀 흥국상사 회장 등이다. 그해 8월 1일 오전 9시. 박 대통령 집무실에서 김 박사는 그동안 준비한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조사보고서'를 브리핑했다.
보고 순서는 △세계 전자공업 현황과 전망 △외국 전자공업 정책 분석 △전자 제품 세계시장 분석과 한국개발 가능성 검토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건의 △전자공업진흥진흥원 설립방안 순으로 진행했다. 김 박사는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건의 사항으로 △진자공업 진흥법 제정과 기술자와 기능공 양성 △해외 과학기술자 유치와 기술정보 활용, 외국 기술도입 △해외 시장개척과 수출 진흥 △방위산업으로서 전자공업 개발 등을 제안했다.
이 자리에는 김정렴 상공부 장관과 신범식 청와대 대변인, 신동식 경제수석비서관, 김동수 상공담당 비서관 등이 배석했다. 브리핑은 장장 3시간 30분간 계속했다. 보고 차트는 80장이었다. 차트를 한 장씩 넘기는 박임숙 상공부 국장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고 끝날 무렵에는 온통 땀 투성이었다. 김 박사는 브리핑을 끝내며 거듭 강조했다. “전자공업은 제품 사이클이 매우 짧아 국내에서 독자 기술을 개발하면 늦습니다. 선진국 기술을 도입해 수출제품을 개발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전자공업진흥원을 설립해 거국적으로 단기간에 전자공업을 육성해야 합니다.”(회고록 '두 개의 해를 품에 안고')
보고가 끝나자 박 대통령이 말했다. “김 박사 수고 많았소.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계속 합시다.” 이날 점심 메뉴는 냉면이었다. 식사 중 김정렴 상공부 장관이 김 박사에게 물었다. “김 박사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브리핑에서 전문적인 용어가 많이 나오던데 예를 들면 축전기와 축전지는 어떻게 다릅니까?” 김 박사가 대답하기 전 박 대통령이 먼저 말했다. “축전기는 콘덴서고 축전지는 배터리예요” 김 박사는 박 대통령의 이해력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김 박사, 그런데 이 중요한 일을 누가 추진하지요?” 김정렴 상공부 장관이 나섰다. “각하 이 안을 만든 김 박사가 아니면 추진할 사람이 없습니다.”
박 대통령이 고개를 돌려 김 박사를 보며 말했다. “김 박사 돌아오겠소?” 김 박사는 순간 당황했다. 당장 컬럼비아대학을 그만둘 수 없었다. 박사과정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고 미국 지원을 받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하, 사정상 당장은 어렵습니다.” 김 박사가 당장 귀국을 못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전자공업진흥원 설립을 보류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