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연구원(IBS)이 올해 11월이면 설립 10주년을 맞는다. IBS는 남의 연구를 좇기만 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우리도 기초부터 창조적인 과학기술 지식을 축적하자'는 취지로 설립됐다. 고된 인내를 먹으며 축적의 시간을 보냈고, 이제 아기의 모습을 벗어났다. 여전히 앳되지만 한층 성장했다. 물론 앞에 펼쳐진 길은 여전히 험난하다. 때로는 태생부터 타 국책연구기관과 다른 모습 탓에 질시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시대적 요구에 발맞춘 연구단 형태의 조직을 유동적으로 구성·운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새롭지만 이질적이다. 시류 대응에 강하고 창조성을 유지하는 것에 능하지만 고충도 만만치 않다. 취임 1년 6개월이 돼가는 노도영 원장이 그 어려운 길에 앞장서고 있다. 노 원장을 만나 지난 10년에 대한 감회, 앞으로 계획과 포부 등을 들어봤다.
-머지않아 기관 설립 10주년을 맞게 된다. IBS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감회는.
▲마냥 편하지 않았다. IBS 설립 초기부터 일부 오해와 비난도 있었다. 연구자 그룹에서도 그랬다. 큰 역할을 맡은 만큼 연구비를 독식한다는 여론도 있었다. 안타까운 부분이다.
기초과학 전체의 위기도 있다.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시각도 IBS 설립 이후 급변했다. 4차 산업혁명 분야가 강조되고,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이슈도 있었다. 굉장히 빠른 호흡의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언젠가 해외 모 연구자에게 IBS에 합류해줬으면 하는 뜻을 전했는데 'IBS가 지속되느냐'고 되물은 씁쓸한 일까지 있었다.
IBS는 기초과학 연구를 하는 만큼 성과 창출이 더딜 수밖에 없다. 그만큼 더 도움을 필요로 했고 많은 분이 IBS를 지켜줬다. IBS 내부 구성원과 전 원장 선배들, 정부, 힘 실어준 언론 등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기관 4대 철학도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자율성' '수월성' '창의성' '개방성'이 4대 핵심가치이자 단단한 토대가 됐다.
지금은 마치 아이를 인큐베이터에서 꺼내는 듯한 느낌이다. '이제 살겠구나'하는 안도감이 든다. 위기는 계속되지만 이겨낼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소명감과 책임감이 있다. 앞으로 더 잘할 수 있다.
-올해 IBS 설립 10주년 행사로 많은 것을 준비하는 것으로 안다.
▲올해 10주년 행사는 IBS가 앞으로 더욱 성장할 연구소라는 것을 우리 국민과 세계에 선보인다는 의미가 있다. IBS 존재를 알리고 성과를 공유하는 것이다.
세계 기초과학 연구기관 수장들과 함께하는 '글로벌 서밋'을 준비하고 있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회(MPG),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 미국 유수 국가 연구기관 디렉터들을 초청할 계획이다. 우리가 이미 그들의 반열에 올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미래를 얘기하는 자리를 마련하자는 취지다. IBS가 세계적인 기초과학연구기관임을 공표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카오스(KAOS) 재단과 함께 IBS 소속 세계 석학을 알리는 석학강연도 추진하고 있다. 우리가 배출한 세계적인 연구자를 국민에게 알리면 자부심을 일깨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적으로 축구 잘하는 사람을 소개해도 메시를 소개하는 것과 손흥민을 소개하는 것은 다른 의미가 있지 않나. 축구의 메시급으로 연구를 잘하는 우리 석학이 있다는 것을 알릴 것이다.
그 밖에도 다양한 대중 콘텐츠를 준비 중이다. 작년 베스트셀러가 됐던 '코로나 사이언스' 후속편을 발간하고, 국민들이 IBS 연구성과를 소재로 영상과 글쓰기 작품을 출품하는 공모전도 열 것이다. IBS 연구단장들이 젊은 이공계 학부생과 대학원생 등을 대상으로 논문 작성법, 프레젠테이션 스킬 등을 강의하는 멘토링 프로그램도 기획 중이다.
-모든 연구단이 다 훌륭하고 자랑스럽겠지만 특히 눈길이 가는 연구단이 있을 것으로 본다. 소개를 부탁드린다.
▲김빛내리 단장(서울대 석좌교수)이 있는 RNA 연구단을 먼저 말하고 싶다. RNA 구조 해석을 하는 곳인데 젊은 연구자에게 연구 기회를 주고 함께 역량을 키워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 바이러스에 대한 대비를 했고, 그 역량을 바탕으로 팬데믹 직후 코로나19 실체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세계적인 성과들을 냈다.
단장 개인의 경우 최근에 한국인 최초로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오히려 해외에서 저에게 '당신이 아는 것보다 훌륭한 분'이라고 추켜세울 정도다.
지하실험연구단(단장 김영덕)도 소개하고 싶다. 우주를 채운 암흑물질을 찾는 곳이다. 이를 통해 우주의 기원과 물질의 탄생이라는 원천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이론적인 측면에서 접근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하실험연구단을 통해 실험적인 접근이 가능해졌다. 굉장히 가치 있는 일이고, 세계적으로도 큰 중요성을 띠는 곳이다.
악셀 팀머만 단장(부산대 석학교수)의 기후물리연구단 연구도 특히 훌륭하다. 해당 연구 분야에서 세계 수준 역량을 갖췄다. 우리도 그렇지만 팀머만 교수가 있는 부산대에서도 세계적인 연구그룹을 배출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질 정도다. 덕분에 다양한 지역 거점 국립대학에서 IBS 연구단 확대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IBS 입장에서도 정말 고맙고 반가운 일이다.
-지난해에 8년차 산하 연구단에 대한 성과평가가 있었다. 결과에 대한 소감은.
▲각기 연구단이 모두 잘했다. 세계 석학을 모셔 평가한 결과 8개 연구단 가운데 3곳은 'S', 5곳은 'A' 등급을 받았다. 평가위원회가 석학들로 구성돼 기준이 매우 높다. 세계 톱 연구집단들과 비교한다. 그 결과는 저도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다. 현재 그 결과를 토대로 연구단 미래를 다시 설계하는 과정에 있다. A 등급을 받은 곳 중 2곳은 10년 기간을 채우고 2년 뒤 종료된다. 또 다른 A 등급 연구단은 단장이 교체된다.
두 가지 생각이 충돌한다. 기초과학 연구를 표방하면서 10년 지원은 부족하다는 의견, 그 정도에 성과가 없으면 안 된다는 의견이 있다. A 등급은 분명 국내 수준에서는 엄청 잘하는 수준임에 틀림없다. 다만 세계 톱에는 부족했다.
연구단 존속과 계속 지원 여부는 정말 많은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기초과학 분야라고 수월성을 따지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율성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지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다.
-연구 수월성을 강조한다면 연구단장 등 인력 수급 면에도 그를 위한 변화가 있을지.
▲설립 당시 IBS는 늦은 만큼 '점프 스타트'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는 각 분야에서 가장 잘하는 분, 시니어 인력을 단장으로 모셔 연구단을 꾸렸다. 이미 성과가 많고 검증된 분들 위주였다. 다만 이런 결정에도 단점은 있다. 연구 전성기 문제다. 연구단을 꾸리고 10년이 지나면 전성기를 넘기게 된다. 앞으로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검증된 성과보다는 잠재력을 더욱 많이 볼 계획이다. 우리에게 조언하는 어드바이저(조언자) 그룹도 그게 맞다고 힘을 실어주고 있다.
물론 아직 꽃피우지 못한 분들이 기존 검증된 분들보다 연구성과 고점이 낮을 수 있다. 누군가는 그것 보라며 단장 잘못 뽑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아무리 수월성을 따진다고 해도 도전할 수 있어야 IBS다. 10개 연구단 가운데 3~4곳 성과가 다소 떨어져도 다른 3~4곳이 세계적인 성과를 낼 수 있으면 된다.
미국 학계가 딱 그렇다. 명문대 기준으로 30대 중반이면 테뉴어(종신재직) 교수가 된다. 40대에 된다면 늦는 것이다. 그런데 테뉴어 교수 가운데 70%가량은 적당히 연구하고 놀기도 한다. 테뉴어를 일찍 주는 것이 위험하다고 볼 수도 있는데 바꾸지 않는다. 30%만 잘하면 되니 리스크를 감수하겠다는 생각이다.
우리도 과감한 결정을 내릴 계획이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과거 10년과는 다른 새로운 10년의 연구단 운영 방안이다. 그에 따른 결과로 비난받을 각오도 하고 있다.
연구 인력에 대한 고민도 있다. 우리는 태생부터 고용 유연성을 갖춘 기관으로 탄생했다. 때마다 훌륭한 연구자를 받아들여 역량을 일신하는 식이다.
좋은 취지지만 연구자 입장에서는 고용 안정성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우수한 인력이 IBS를 기피하는 문제도 있다. 우수인력 확보가 어려워지고 있다. 많이 고민되는 부분이다. 여러 가지 절충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바이러스기초연구소를 품게 돼 세간의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이에 대한 생각, 앞으로의 계획은.
▲바이러스기초연구소는 기초과학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 생각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맡게 됐다. 사실 이 연구소는 기존 우리 방식과 일부 차이가 있다. 우리는 그동안 상향식(바텀업) 방식으로 연구 주제를 설정하고 연구를 진행했는데 바이러스기초연구소는 하향식(톱다운)이다. 그러나 위험한 상황에 국가적 책무를 맡는 것인 만큼 열심히 임할 계획이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아직 바이러스 관련 연구 역량, 인력이 모두 부족하다. 기초과학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으로 IBS에서 맡는 것이 주효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무래도 국가적으로 전략적인 연구조직인 만큼 다른 연구단과 같이 외국 인력을 모시는 것은 안 된다. 우리 국민이 주체가 돼야 한다.
가능하면 이달 중에는 소장을 결정할 계획이다. 인프라 확충도 이미 시작됐다. 자체 건물을 IBS 원내에 지을 계획이다. 파스퇴르연구소 내 공간도 추가로 활용하게 된다.
-IBS 연구 중점사항은 아니지만 노벨상이나 스핀오프 창출과 같은 가시적 성과를 기대하는 이들도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느 과학자도 노벨상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고 지식을 창출할 때 상이 뒤따라오는 것일 뿐이다. 다만 과학기술력을 따지는 척도는 될 수 있다. 국가적으로는 매우 소중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세계 10위권 경제력을 가진 우리나라가 노벨상 수상이 없다는 것에 아쉬움을 품는 국민도 많다.
다만 이런 부분을 생각해주면 좋겠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가 노벨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초창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정부출연연구기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은 외국 기술을 따라가 우리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우리나라가 남들이 하지 않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 것은 아주 최근에나 시작됐다. 물론 IBS가 그 역할을 하고 있고, 과거에 비해 우리나라가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기다림이 필요하다.
스핀오프의 경우 노벨상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본래 목적은 아니다. 우리가 부를 창출하는 것에 미션을 둔 곳이 아니다. 다만 '목적'과 '결과'는 다를 수 있다. 스핀오프라는 이름대로 목적과 다른 성과가 나올 수 있는 일이다. 국민의 삶을 지키고 국가를 부강하게 할 수 있는 성과가 나올 수 있다면 당연히 힘을 실을 것이다.
◇노도영 IBS 원장은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물리학과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엑슨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는 등 미국 생활을 이어가다가 1995년 귀국해 광주과학기술원(GIST)에서 교편을 잡았다. GIST 극한광응용기술 국가핵심연구센터장, GIST 대학장, 기초기술연구회 이사, 국가과학기술심의회 기초기반전문위원장, 한국방사광이용자 협회장 등을 거쳤다. 현재 IBS 원장, GIST 극미세초고속 X-선과학 연구센터장,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위원이다.
대전=김영준기자 kyj85@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