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산시 대산면 독곶리 황금산. 높이 156m의 나지막한 산인데도 바닷가 기암절벽으로 꽤나 유명하다. 그러나 내 발길을 잡은 것은 바로 옆에 펼쳐진 거대한 석유화학단지였다. 매립된 바다는 50여개 기업이 모인 산업단지로 변했고, 먼지 풀풀 날리던 2차로의 비포장 도로는 말끔한 4차로 도로가 됐다.
나프타분해센터를 기획하던 31년 전 기억이 살아난다. 경기도 김포에서 헬기 타고 서해바다 위를 날면서 가슴 졸이던 때 기술 도입을 위해 세계 유수의 화공플랜트 회사들을 뒤지던 일, 끊임없이 써야 하는 보고서 때문에 과로사를 걱정하던 날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프타에서 수많은 제품으로 뻗어 나가는 석유화학 계통도를 외우던 일도 어려웠다. 경영학과 출신이 석유화학 제품은 물론 엔지니어링 플라스틱과 정밀화학 제품에 이르기까지 생소한 영어 이름 외우느라 고생 꽤나 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때의 고생 덕에 얄팍한 지식이라도 얻었고, '상대 화공과 출신'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나의 '출신'은 자동차, 엔지니어링, 조선, 건설장비, 디스플레이 등으로 계속 바뀌어 갔다.
학교에서 배운 전공 지식이 회사에서는 큰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전공 분야와 다른 일을 하는 때도 많고, 다행히 같은 분야에서 일하더라도 학교에서 배운 내용은 금세 옛것이 된다. 매일매일 맞닥뜨리는 일상 업무, 월급을 받으면서 익히고 축적한 지식과 경험이 곧 자신의 전공이 되는 거다. 대학이나 연구소 등 고도의 전문 지식이 요구되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문과(또는 이과) 출신이어서 모르거나 할 수 없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당연한 일이지만 국내 제조업체 최고경영자(CEO)를 보면 이공계 출신이 압도한다. 그러나 인문계 출신으로 두각을 나타낸 이도 적지 않다. 무역과 출신으로 국가대표 전자회사 부회장까지 오른 분도 있고, 영문과 출신으로 세계 수준의 디스플레이 기업을 이끌어 가는 이도 있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법대 출신으로 국회 보건복지위에서 오래 활동한 도지사 한 분은 수소에너지, 미래의료, 인공지능(AI), 드론 등 미래 기술 분야에 대해서도 왕성한 호기심을 보인다. 지금도 주말을 이용해 전문가들과 토론회를 계속한다. 지리학과와 언론대학원을 나오고 방송사 앵커로 이름을 떨친 모 장관은 낯선 물리학 이론인 양자역학까지 꿰고 있다고 한다.
두 분 모두 4선 의원을 지냈다. 생소한 분야에서 상당한 내공을 쌓는 일이 책임감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호기심과 열정에서 비롯된 고독한 학습이 쌓이고 어우러진 결과일 것이다. 쫓기는 일정 속에서도 질문, 관찰, 경청, 탐구를 계속한 결과다. 관심과 호기심이 충만하면 질문이 많아지고, 공부하고 검색하면서 스스로 해답을 찾는다.
혁신의 아이콘이라는 스티브 잡스도 철학과를 중퇴한 뒤 선불교와 캘리그래피에 심취한 인문학도였다. 미래 설계자로 불리는 일론 머스크는 학부에서 경제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자동차는 지금도 전자·반도체 부품이 절반 이상이어서 수송기계라 하긴 멋쩍다. 머지않아 통신 단말기나 인포테인먼트 공간으로 바뀔 것이고, 조립은 로봇과 AI가 맡게 될 것이다.
미국의 로컬모터스는 3D프린팅 자동차에 도전하고 있다. 2만여개 자동차 부품을 40여개 모듈로 단순화해 플라스틱만으로 자동차를 만든다는 것이다. 모토는 3P. '출력하고(Printed) 광내고(Polished) 칠하자(Painted)'는 의미다.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대신 클릭 한 번으로 출력해서 차 한 대를 뚝딱 만든다는 것이다. 창업자 존 로저스 회장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MBA) 출신이다. 이(理)란 '옥돌의 무늬, 즉 자연의 이치'요, 문(文)이란 '사람 마음속의 무늬, 즉 인간의 이치'라고 한다. 이과든 문과든 무늬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본질이 같다는 것이다. 초연결·초융합 시대가 아닌가. 특정 분야의 지식보다는 생각, 협업, 소통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하다.
이과·문과라는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후배들이 안타깝고, '문송'이라는 신조어에 즉각 거부감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윤종언 충남테크노파크 원장 joyoon@ctp.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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