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남이 먼저 해놓은 것을 대체로 당연하게 여긴다. 표준도 그렇다. 우리나라는 공업국가로 도약하기 위해 1961년 산업표준화법을 제정하면서 국가표준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자본이 부족하고 기술도 빈약한 나라에서 민간 기업이 표준을 개발하고 제정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정부가 나섰다. 정부가 나섰다고는 하지만 정부도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그러니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가져온 표준을 기업에 사용하라고 권장했다. 정부는 싼 값으로 기업에 국가표준을 쓰도록 하고, 인증비용도 아주 헐값으로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 기업들은 남의 표준이 아니라 우리가 힘들게 만든 표준을 쓰면서도 여전히 귀한 줄 모른다. 표준은 정부가 거의 공짜로 줘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깜깜한 방에 까만 고양이를 잡으려고 뛰어다니고, 마침내 몇몇은 까만 고양이를 잡았다고 소리친다. 그런데 원래부터 그 방에는 까만 고양이가 없었다. 아직도 사람마다 1·2·3차 산업혁명을 다르게 이야기한다. 그러니 4차 산업혁명을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런 단어에 매몰되지 말고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아주 큰 변화를 살펴보자. 전화, 자동차, 가전, 빌딩, 보건, 의료, 공장, 에너지 등 단어 앞에 '스마트'를 붙여 보자. 그리고 이런 것들이 모인 '도시'라는 단어 앞에도 '스마트'를 붙여 보자. 모든 것의 스마트화가 지금 불어오는 바람이다. 이런 바람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융·복합화'다.
사람들은 왜 융·복합화된 기능이나 서비스를 좋아할까. 우선 사용자 입장에서 편리하다. 생산성도 올려주고 환경 보호도 하게 되는 등 여러 이유로 융·복합 서비스가 나온다. 융·복합을 잘하려면 기능이나 서비스를 편하게 합칠 수 있어야 한다. 편하게 합칠 수 없으면 융·복합 성과는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
아이들이 블록을 이용해서 집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드는 등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 낸다. 못 만드는 것이 없다. 그리고 블록을 붙이는 것은 정말 쉽다. 이런 블록 하나하나를 기술 용어에서는 모듈이라고 한다. 그래서 융·복합을 쉽게 하려면 모듈을 잘 만들어야 한다. 모듈을 연결하는 부위가 아주 잘 정의돼야 한다. 이 정의가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표준 가운데 한 부분이다. 표준은 기술상으로 복잡한 이질의 모듈을 편리하게 융·복합해서 경쟁력 있는 기능과 서비스를 가능하게 해 주는 윤활유다.
이질 모듈과 관련해 이들을 각각 관장하는 우리나라 정부 부처 또한 서로 이질화돼 있다. 과거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에서 일괄 제정·관리하던 국가표준을 9개 부처로 나눴다.
이제 새로운 융·복합화를 위해 이질화된 표준을 관리하기 위한 오케스트레이션이 필요하다. 최근 우리나라 20세 이하 축구 대표 팀이 믿기지 않은 돌풍을 일으켰다. 이런 성과는 다들 주목하는 것처럼 감독이 리더십을 발휘해서 어린 선수들을 잘 오케스트레이션했기 때문이다. 융·복합을 위한 시스템 표준도 마찬가지지만 리더십을 갖춘 감독이 안 보인다. 개별 부처가 각자 영역에서 소리만 친다. 이러니 융·복합 기술을 위한 국제기구 시스템 표준 개발 방식이 우리나라에서 아직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제품이나 서비스 융·복합화, 사물 스마트화, 4차 산업혁명 폭풍을 끌고 가는 것은 표준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표준 생태계는 총체 난국이다. 기업은 표준 세계에서 2등석에 앉아 있고, 정부는 리더십 있는 장수 없이 분야별로 각개 전투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표준 관련 정부 예산은 연구개발(R&D) 총액 대비 0.3%에 불과하다. 정부도 표준을 귀한 줄 모르고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정부나 기업은 이미 표준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 알고 있다. 시간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흘러간다. 행동이 중요하다.
강병구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교수 bgkang@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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