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당시에는 태극기 부대가 주력이었나요?” 태극기를 들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많은 사람을 본 아이에게 100년 전의 3·1운동은 낯설다. 숨 막히는 정치 억압, 경제 탈취, 문화 약탈 경험은 아픔이지만 이를 기반으로 목숨을 바쳐 가며 일제 강점에 저항한 숭고한 가치는 새롭게 계승할 필요가 있다. 27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릴 예정인 북·미 정상회담이 남북한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믿는 한 아직 3·1운동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홀로 서는 것'이라고 정의된 독립은 '자유와 존중'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개인이 일상에서 자유로움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갑질'과 '불평등'이 존재하는 한 유의미하다. 3·1운동의 계승과 완성이 필요한 이유다.
개인은 정치, 경제, 노동, 문화 등 모든 권력의 지배에서 독립해야 한다. 특히 모든 문제를 정치권력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정답이 아니다. 남을 돕는다는 핑계로 권력 이용을 정당화하는 것은 지도층의 그릇된 시각이다. 청와대를 포함한 고위층이 개입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얄팍한 사고가 권력의 피해자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정부 개입은 반대하면서 문제가 발생하면 국회와 정부를 들락거리는 사고의 양면성이 해결되지 않으면 정치권력의 제거는 요원하다.
경제 권력에 의한 횡포와 문화 권력의 폭거도 사라져야 한다. 권력자의 포기와 피권력자의 독립 의지가 동반돼야 가능하다. 급여를 지급한다고 직원을 노예화한 상사나 돈을 만능으로 착각하는 일부 부유층이 무시당하는 사회 분위기를 형성하면 경제 권력은 사라질 것이다.
억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무의식은 제거돼야 한다. 유신 헌법을 암송하면서 무감각하지 않던 일부 젊은이들이 민주화를 가능케 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물론 언론과 미디어가 주도하는 문화 권력도 주의 대상이다. 통제되는 언론과 스스로 통제받으려 몸부림치는 미디어는 생명력 잃은 문화 권력의 산물일 뿐이다.
사회 구성원은 누구나 불평등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간혹 불평등의 산물인 언어나 조직의 교정이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법이라고 착각하지만 근본 해결책은 아니다. 문제의 뿌리를 찾아야 한다. 제거해야 하는 남녀차별, 노소차별, 지역차별 등의 뿌리는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오만이다. 모두에게 익숙한 차별된 사회를 하루아침에 변화시키려는 욕심은 또 다른 차별을 양산할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부정부패로부터의 독립도 중요하다. 권력과 욕심은 합치하면서 피해를 양산한다. 뇌물로 표현되거나 부정청탁으로 나타나는 부작용은 둘 가운데 하나만 결여돼도 나타나지 않는다. 권력과 욕심을 분리하기 위한 제도 장치가 마련되면 부정부패를 축출할 수 있다. 양심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부정부패를 제거하려는 노력은 한계에 부닥쳤기 때문이다.
독립의 전제 조건은 독립 의지와 노력이다. 개인의 자유와 존중 가치가 인정돼야 독립은 의미가 있다. 의지 표현이 없으면 목표 달성도 불가능하다. 북·미 정상회담에서 나타나는 강대국 권력, 국회와 정부의 권력 남용, 재벌의 끝없는 약탈 생리, 단체가 지닌 조직 권력의 횡포 등에서 탈출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부작용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과속하지 않는 지혜도 필요하다. 100주년을 맞는 2019년 3·1절은 독립 운동 계승과 완성을 향한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정태명 성균관대 소프트웨어학과 교수 tmchung@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