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국가과학기술연구회가 산하 25개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대상으로 '역할과 책임'(R&R) 재정립 작업을 펼치고 있다. 출연연별로 중점 연구 분야를 재설정, 고유 연구 영역에 해당하는 분야 연구는 출연금으로 진행하도록 하겠다는 의도다.
지난 9월 초 25개 출연연과 큰 틀의 방향성을 담은 'R&R 업무협약'을 맺었고, 이달 중에는 출연연별 역할과 기능을 더 세분화해서 대국민 발표를 할 예정이다.
그러나 아직은 출연연 반응이 미적지근한 모양새다. 공무원들 입에서 “이달 중에 대국민 보고를 못할 수도 있다”면서 “힘이 빠진다”는 얘기가 나온다. 출연금과 연구과제중심운영방식(PBS) 비중을 조율할 인건비 포트폴리오를 요구했지만 아직 제출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19개 기관이 과기연에 PBS 개선안을 제출했지만 이 가운데 절반은 내용이 충분하지 못한 것으로 지적됐다.
출연연 R&R와 PBS는 상호 배타 성격을 띤다. PBS 비중이 높을수록 R&R는 약해지고, R&R를 강화하려면 PBS 비중을 낮춰야 한다. 이번 출연연 R&R 재정립 작업은 곧 PBS 개선 작업을 위한 정지 작업인 셈이다.
출연연 입장에서도 존재 이유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R&R 작업이 절실한 시점이다. 출연연은 정부가 국가 발전을 위해 필요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설립했지만 특수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정부 탓이 크다. 관리 편의를 위해 도입한 PBS 비중이 과도하게 높아지면서 출연연 R&R를 변질시켰다. 특히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경우 PBS 비중이 전체 인건비의 75%에 이르다 보니 원장이 조직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 물론 출연연마다 비중이 다르기는 하지만 PBS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연구원 인식도 '우리 연구'라는 개념보다 '내 연구'라는 방향으로 좁아졌다. 이 같은 변화는 '출연연 혁신'을 과학기술계의 오랜 숙원 과제로 만들었다. 많이 늦었지만 이번 정부의 출연연 R&R 재정립 사업은 그래서 더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문제는 이번 작업이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어 치워 내야 할 걸림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출연연 입장에서도 이들 변수를 따지다가 선뜻 포트폴리오를 내놓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PBS 과제는 한 부처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여러 부처에서 시행하다 보니 법과 제도를 바꿔야만 모두를 출연금으로 전환할 수 있다. 운영비가 축소되는 것이 아니냐는 출연연 불안도 불식시켜야 한다. 출연연 입장에서는 정부가 출연금을 언제고 줄일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있다. PBS라는 뜨거운 감자를 선뜻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각에서는 PBS 과제를 수행하면서 받아 온 인센티브를 못 받게 된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출연연이 다시 국가 발전을 위한 연구 과제를 효율 높게 수행할 수 있는 방향으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연구비 사용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연구 윤리를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 등은 그 위에서 추가로 풀어 나가야 할 숙제다. 더 이상 관리 수단이 목적을 뒤흔들게 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이번 출연연 R&R 재정립이 출연연에 몸담고 있는 연구원만큼은 국가 발전을 위해 봉사한다는 소명의식과 자긍심으로 재무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김순기기자 soonk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