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으로 알려진 식당은 식사 시간 등 피크 타임 때 어김없이 긴 줄이 이어진다. 비슷한 메뉴를 제공하는 집이 주변에 여럿 있어도 다른 집은 텅 비어 있고, 유독 한 곳은 긴 줄에 또 길이를 더한다. 얻어먹으러 온 사람처럼 취급 받으면서도 고객은 호인이 돼 마냥 기다린다.
찾는 손님은 많은데 공간은 제한돼 있고 서비스 인력은 한정돼 있으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일 수 있다. 음식이 맛있고 손님에게 친절하고 공간이 쾌적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줄 서 있는 집은 음식 맛이 뛰어나거나 가격이 싸다는 것을 뺀 다른 요소에선 낙제 점수인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식당은 더 이상 규모가 영세하거나 생계 유지가 어려운 곳이 아니다. 고객 때문에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달라지지 않았고, 바꿀 생각은 전혀 없다.
이렇듯 인기(?) 있는 '을'은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것을 미안해 하기보다 대체로 '우리 음식이 맛있으니 너희가 찾아온 거지'라는 표정과 말투가 느껴진다. '한 끼 식사하는데 뭐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나. 음식 맛있고 가격 적당하면 되지!' '갑'은 갑대로 관대함(?)이 넘친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바로잡아야 할 것을 바로잡지 않는 데서 문제는 고착화된다.
그 문제는 또 다른 영역으로 전이된다. 모든 문제의 본질은 통한다.
거래에는 언제나 갑과 을이 존재하고, 각기 다른 거래에서 누구나 갑이 되기도 하고 을이 되기도 한다. 줄 이어 기다리는 것을 참고 황당한 상황을 당해도 둔감하게 받아들이는 '갑'은 '을'이 됐을 때 어이없는 '을' 행태를 보이면서 그것이 비정상임을 모른다.
부모의 손을 잡고 그런 현장을 반복적으로 체험하고 둔감해진 아이는 그런 것에 자연스럽게 길들여진다.
맛집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경쟁사에 비해 제품 및 서비스가 우월한 '을'은 '갑'보다 더한 횡포를 부린다. 국민에게 봉사할 임무를 진 행정기관 공무원, 시민 안전을 책임지는 경찰, 국민의 뜻을 대변해야 하는 국회의원 등 모두 국민으로부터 급여를 받는 '을'임에도 '갑'처럼 행세한다.
손님을 물건 취급하고 상스런 표현을 일삼고 서비스 정신이라곤 '1'도 없는 서비스 제공자와 그런 '을'을 만들어 내고 지금도 키워 주고 있는 주체는 그곳을 찾는 우리 자신, 즉 '갑'이다. 기본을 모르는 공무원, 온갖 비리를 일삼는 국회의원, 오만한 판사, 파렴치한 지도자 등 뉴스를 장식하는 해괴한 '을'을 만드는 것이다. '갑'인 국민이 '갑'의 역할을 제대로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작은 것에서 기본이 허물어지고 생활 속에서 상식이 통하지 않는데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집소성대(集小成大)다.
몇 해 전 친구들과 부부 동반으로 일본 남부 지역을 여행할 때 일이다. 식사 장소로 이동하다가 식당 주인과 얘기하던 여행 안내자가 통화가 끝나자 울먹이는 표정으로 당황스러워 했다. 예약 시간보다 식당에 45분 정도 늦을 것이라고 전화했더니 식당 주인은 그렇다면 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우리 식당 메뉴를 손님이 제대로 식사하려면 최소 한 시간이 걸리는데 예정보다 45분 늦으면 직원 휴식 시간 전까지 손님이 식사를 마칠 수 없다. 그러므로 안 오는 것이 좋겠다'는 게 이유였다.
여행 안내자는'우리는 빨리 먹을 수 있으니, 괜찮다'고 부탁했지만 거절 당했다.
다른 곳을 갈 수밖에 없었지만 흐뭇함을 느꼈다. 그런 의식이 있는 소시민을 둔 나라가 부러웠다. 지방의 조금만 식당 주인 입장에서 단체 손님을 포기하는 것이 쉬운 결정이었겠는가. 사흘 전에 예약했으니 당연히 재료와 관련 준비가 됐을 것이다. 이 경험은 한 사람이라도 더 자리에 앉히려고 피크 시간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합석을 권하는 우리네 맛집과 대비돼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들의 이런 의식이 어디 하루아침에 이뤄졌겠는가.
한 유명인이 '손님이 줄 서게 하는 식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고객이 서비스, 음식, 가격 모든 것에 만족해서 다시 찾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이겠지만 표현은 옳지 않다. '줄 서기 마케팅'이 마케팅 전략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서비스 산업에서의 의식은 달라져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갑'을 세심하게 배려하고 '갑'의 만족을 위해 노력하고 고민하는 기업, 조직, 자영업자, 공직자가 대다수인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아직도 오만한 맛집, 독점 지위의 기업, 본분을 잊은 공무원, 수준 이하 정치가 등 바뀌어야 할 '을'이 곳곳에 있다.
힘 있는 을, 잘 나가는 을에게 '바른 말'을 하고, 그래도 바뀌지 않는다면 '갑'이 그들을 도태시켜야 한다. 아무리 맛있는 식당이라 해도 가면 안 되고, 봉사가 의무인 것을 모르는 공복(公僕)은 그 자리에 머물게 해선 안 된다. 그래야만 바뀐다. 이것이 바른 의식을 정착시키는 시작이고, 모든 갑이 짊어진 의무이다.
긴 여정이지만 지금 우리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일이다.
이장석 한국영업혁신그룹(KSIG) 대표 js.aquina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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