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최형섭과 이휘소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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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10월 초 노벨상 수상자 발표 시즌이 되면 어김없이 한국은 왜 노벨상을 못 받는지 과학기술계에 관심이 집중된다. '기초과학에 집중해야 한다' '암기식 교육이 문제다' 같은 주장이 뒤따른다. 문제의식과 뻔한 해결책이 해마다 반복되는 상황에서 새삼 근본 질문인 '과학기술이란 무엇인지'라는 정체성에 관한 성찰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은 영어로 '과학과 기술'이라는 2개 단어로 번역되며, 한국에서만 독특하게 하나의 단어로 사용된다. 헌법에서도 과학과 기술은 독립된 단어로 사용되지 않는다.

과학기술이라는 용어는 1960년대 산업화 시대에 생성돼 고착된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산업화 시대 '과학기술'은 공업화를 이룩하기 위한 '산업기술'이었다. 이는 1966년에 설립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최형섭 초대 소장 회고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신생 KIST를 이끌어 갈 핵심 연구원 채용을 위해선 해외 과학자를 유치할 수밖에 없었다. 응모자 500여명 가운데 당시 이론물리학으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던 이휘소 박사가 KIST에서 일해 보겠다고 편지를 보내 왔다. 최 소장은 “KIST는 우리나라 공업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산업계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 개발에 치중해야 할 공업기술 연구기관인 만큼 아직 기초연구를 할 단계가 아니며, 지금까지 훌륭한 업적을 올리고 있는 이 박사는 거기서 머물면서 그 분야에서 대성해 주기 바란다”는 회신을 했다고 한다.

산업화 시대 과학기술 정책은 선진국에 이미 존재하는 산업기술을 내재화하는 정책이었다. 산업화 시대 추격형 과학기술 정책은 선진 기술 모방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서 성공은 예정돼 있었다. 이처럼 과학기술이 경제 발전 수단으로 규정된 것은 산업화 시대였고, 광복 이후 헐벗어 있던 시절에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게 된 것은 과학과 기술을 하나로 묶어 경제에 종속시키는 절박하면서 탁월한 전략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시대에 산업화 시대 때 고착된 '과학기술'이라는 심장은 과학과 기술이 너무 밀착됨으로 말미암아 협심증에 걸리게 됐다. 과학이 기술의 발전을 위한 기본 수단으로 한정되면 과학과 기술 각각에 있는 고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즉 당장 기술을 창출하지 않는 과학은 소홀히 여겨지게 되고, 반대로 과학에서 유래하지 않는 기술은 천시되거나 불신당하는 경향을 낳는다.

협심증은 과학과 기술 각각의 개별 특성에 맞춘 정책 수립에도 장애가 된다. 지원 규모가 큰 국가 연구개발(R&D) 사업은 예비타당성(예타) 조사를 통과해야 국가 예산이 투입될 수 있다. 이때 기술·정책·경제 부문 타당성을 평가한다. 경제 및 기술 파급 효과가 중요한 공학기술 분야와 달리 순수과학 분야는 기술·경제 부문 타당성 항목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가 어렵다. 순수과학에 대해 경제 및 기술 부문 타당성 평가가 합당한지 근본에 대한 의문이 든다. 대표 사례가 지난해 경제성 평가에 막혀 기획재정부의 문턱을 넘지 못한 '양자정보과학기술' 예타 조사다.

최형섭 소장으로부터 퇴짜를 맞은 이휘소 박사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언젠가 KIST가 기초연구를 할 처지가 되면 반드시 저를 가장 먼저 불러 주십시오.” 이에 대해 최 소장은 “이처럼 앞을 내다볼 줄 아는 합리 타당한 젊은이도 있구나”라고 회고록에 썼다. 만일 이 시점에서 최 소장이 다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고, 젊은 이 박사로부터 한국에서 '양자정보통신' 기초연구를 하고 싶다는 편지를 받았다면 뭐라고 답했을까.

부경호 기초과학연구원 이노베이션팀 책임기술원 spero@ibs.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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