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연구하려면 신고하고 하라.”(대기업 연구소 간부) “차라리 300인 이하 중소기업으로 이직하는 게 낫다.”(중견기업 직원)
대기업 간부들은 주 52시간 근로 준수·감독에만 열을 올린다. 직원들은 효율 높게 일하지도, 그렇다고 편히 쉬지도 못한다. 중견기업은 근로자들이 중소기업으로 빠져나가는 새로운 인력난에 부닥쳐 공장 가동 중지를 우려했다. 근로시간 단축 시행 한 달 사이에 산업계 현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29일 산업계에 따르면 주 52시간 근로시간 단축 시행에 따른 각종 과도기 행태가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 현장에선 근무 환경과 분위기, 업무량 축소나 대체 인력 등 쉴 수 있는 제반 사항 등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채 제도가 도입됐다. 그러다 보니 관리자도 근로자도 일단 시간만 지키며 서로 눈치를 보는 형국이다. 그러는 와중에 업무량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조만간 '생산성' 문제가 불거질 것으로 보인다.
최근 한 대기업 연구소에서는 인사팀장이 박사급 연구원들을 소집, 주 52시간 근로시간을 반드시 준수할 것을 지시했다. 인사팀장은 “우리 같은 대기업이 무조건 (정부의) 타깃”이라며 어떤 일이 있어도 걸리면 안 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심지어 연구원장급인 부사장은 3분기에 자신의 업무 3분의 1을 근태 관리에 쓰겠다고 공언했다. 무조건 주 52시간을 준수하고, 절대 야근하지 말라는 지시가 뒤따랐다.
그렇다고 연구원들이 근로시간을 준수하면서 열심히 연구 활동을 한 것도 아니다. 같은 회사 한 연구원은 “주 52시간 도입에 따라 야근이 사실상 금지되면서 업무 효율성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면서 “특히 밤에 창의력이 왕성한 SW 쪽 연구자들은 불만이 많다. 다들 '올빼미'형인데 야근을 못하니 답답하다는 얘기까지 나온다”라고 전했다.
연구원들은 그동안 늦은 시간까지 편하게 실험·연구를 해 왔지만 지금은 어려워짐에 따라 아쉽다는 반응이 많다는 것이다. 유연근로제 등 시스템을 부랴부랴 준비했지만 회사에서는 불가피하게 야근을 시험할 경우 임원에게 신고하라는 것 자체가 눈치 보인다는 설명이다. 이 연구원은 “부사장까지 나서서 야근을 하지 말라는데 굳이 야근하겠다고 신청할 사람이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중소·중견기업에 근로시간 단축은 재앙으로 다가왔다. 주 단위 근무시간을 52시간으로 제한하려면 일이 몰리는 기간을 위해 더욱 많은 근로자를 고용해야 한다. 일감이 적을 때 감내해야 하는 비용도 더 늘어난다.
그러나 주휴 수당이나 연장근로 수당을 받지 못해 임금과 퇴직금이 줄자 근로자들이 300인 이하 중소기업으로 대거 이직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사람은 더 필요한데 오히려 인력이 유출되고 있다. 중견 제조업체는 당장 공장 가동이 위태로운 상황이 됐다.
무엇보다 대기업에 부품·소재를 납품하는 중소기업은 납기를 맞추기 위해 일이 몰리는 경우가 많다. 글로벌 시장 역학관계나 경기 변동에 따라 생산량, 단가 조절 등이 일어난다. 계절에 따라 수요 변동이 큰 제품을 생산할 경우 인력이 몰리는 기간은 더욱 뚜렷하다. 24시간 공장을 가동하지 않으면 큰 손실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52시간을 지키자니 추가 투입할 인력이 없고, 공장을 계속 돌리자니 사업주는 범법자가 될 판이다. 당장 예정된 납기일을 어떻게 맞출 수 있을지조차 걱정이다. 이에 따라 중소·중견기업계는 탄력근로시간제 단위 기간 확대와 일자리 매칭·지원 정책 요건 현실화 등이 시급하다고 주문했다.
함봉균 산업정책부(세종) 기자 hbkone@etnews.com, 박정은기자 jepark@etnews.com, 오대석기자 ods@etnews.com, 최호 산업정책부기자 snoop@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