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 18일 공개한 국제질병분류(ICD)-11 최신판에 게임장애를 중독장애(addictive disorders) 섹션에 추가했다. WHO는 수년 전부터 작업한 ICD-11 초안에 게임장애를 명시했다. 지난 해부터 논란이 끊이질 않았지만 WHO는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WHO가 2019년 총회에서 ICD-11을 확정하면 2022년부터 실제 적용이 시작된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그동안 ICD를 자국 보건정책 기준으로 삼아왔다. 2025년 개정이 예고된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 역시 ICD-11을 참고한다.
KCD가 ICD-11을 반영하면 게임장애는 우울증, 알콜중독처럼 정식 병명이 된다. 게임에 일명 '질병코드'가 생기는 것이다. 병원이 게임장애를 판정하고 치료하며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진료 수가를 청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의료계 관계자는 “ICD가 게임장애를 명시하면 사실상 '중독'이라는 이름으로 의료계가 이 사안에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기는 것”이라면서 “KCD가 이를 받아들이기 전에도 의료 현장에서 게임을 질병 카테고리로 취급하는 흐름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게임=질병, 한번 실패했던 의료계 주도권서 유리한 고지
국내에서 게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거나, 게임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증상을 일컫는 용어는 제각각이다. 게임업계는 '게임과몰입', 의료계는 '게임중독'을 주로 쓴다. WHO가 '게임장애'를 추가하며 명칭이 하나 더 늘었다.
중독과 장애라는 용어를 쓰는 쪽은 게임 몰입을 정신질환으로 본다. 의사·학부모 단체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국내 정신과 의사들이 중심인 중독포럼은 인터넷을 마약, 알콜, 도박과 함께 4대 중독 가운데 하나로 본다. 게임은 인터넷에 포함된다.
중독포럼은 △75만명 청소년이 인터넷 중독으로 일상생활 장애를 겪고 △청소년 학습 기회 손실 비용 최저 4000억원에서 최고 1조4000억원으로 추산한다.
중독포럼은 △인터넷 게임에 중독돼 현실과 가상세계를 구분하지 못하여 살인, 금품갈취, 폭력 등 묻지마 범죄를 저지르는 등 여러 사건과 사고 발생하고 △과도한 인터넷 사용은 탈수, 영양 결핍을 일으켜 죽음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고 지적한다.
게임 몰입 증상을 질병으로 간주하는 것은 결국 의료기관 치료를 전제로 한다. 중독을 유발하는 게임을 만든 회사가 이 비용 일부를 부담해야 한다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2013년 한국에서 실제로 이 논리를 법제화 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게임을 알콜, 마약, 도박과 동일 선상에서 다루는 중독포럼 논리는 2013년 6월 정신과 의사 출신 신의진 국회의원(당시 새누리당)이 대표 발의한 '중독 예방 관리 및 치료를 위한 법률안(일명 4대 중독법)'에 그대로 반영됐다. 이 개정안은 여러 논의를 거치며 결국 19대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해 자동 폐기됐다.
4대 중독법에 앞서 여성단체 출신 손인춘 의원은 2013년 1월 '인터넷게임중독 예방에 관한 법률안' '인터넷게임중독 치유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일명 손인춘 법으로 불리는 이 법은 △중독 예방조치를 하지 않거나 중독성이 높은 인터넷게임은 최대 매출 5% 혹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5억원 이하까지 과징금을 매기고 △여성가족부 장관은 인터넷게임 관련 사업자에게 연간 매출액 1%이하 범위에서 인터넷게임중독치유부담금을 징수할 수 있게 했다.
여가부가 인터넷게임중독치유센터를 설립하고 치유센터는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보호자가 치유를 원하면 지체 없이 중독자를 치유해야 하는 등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강한 규제가 골자다. 손인춘 법 역시 여러 논의를 거쳤지만 19대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며 자동폐기 됐다.
◇ 다시 수성해야하는 게임업계, “부작용 최소화 할 시스템 이미 작동”
게임업계가 게임과몰입에 마냥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다.
게임업계가 공동 설립한 게임문화재단은 2011년 6월 중앙대 병원에 '게임과몰입상담치료센터(현 수도권 게임과몰입힐링센터)'를 개설했다. 2014년 10월 전국을 아우르는 권역별 게임과몰입힐링센터를 개소했다. 개소 이후 연간 수억원, 누적 100억원 이상 예산을 투입했다.
2018년 현재 전국 5개 게임과몰입 전문 치유 기관으로 허브센터 수도권(중앙대 병원), 경북권(대구카톨릭대병원), 전라권(국립나주병원), 충청권(건국대충주병원), 수도권(푸르메재단넥슨어린이병원)까지 거점을 운영 중이다.
3차 의료기관에 속한 센터는 정신과 전문의를 주축으로 게임과몰입 상담과 치유 전문 기능 제공한다. 아동 청소년은 물론 성인까지 검사, 진료, 치료, 입원이 가능하다. 게임에 과도하게 몰두하는 증상을 관리하는 의료 시스템이 이미 작동하는 셈이다.
힐링센터는 게임을 정신질환 원인으로 단정하기보다는 우울증이나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충동조절장애 같은 정신질환에 따른 결과로 접근한다. 게임 자체를 질병 유발 요인으로 보는 입장과 다르다.
정의준 건국대 교수팀은 2014년~2015년 청소년 2000여명을 대상으로 추적 조사한 '게임이용자 패널연구'를 진행했다. 이 연구는 건국대, 아주대, 강원대, 서울대병원, 중앙대병원이 참여했다.
연구에 따르면 청소년 게임 이용자의 경우 학업 스트레스 등 환경적 요인이 자기통제력 상실로 이어지고 게임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정의준 교수는 “게임에 몰두하는 증상이 게임 자체로 인한 것인지 주변 환경으로 인한 것인지 의학·사회적으로 여전히 정리가 덜 된 상황”이라면서 “현재 ICD-11이 제시한 기준은 현장에서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표> 게임질병화 찬성·반대 입장 차이
김시소 게임 전문기자 sis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