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종이책을 읽는 사람보다 모바일 기기로 정보를 얻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이 눈에 띈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가족, 친지와 영상 통화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예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변화 속도도 더욱 빨라질 것이다.
문재인 정부도 이러한 환경 변화를 적극 받아들이는 모양새다. 주요 부처들은 우리 사회가 기술 융합을 통해 기존의 것을 뒤엎으면서 급격히 변화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에 대한 과학기술 대응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전략 제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전략이 시행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전략이 타당한지 평가하는 절차를 넘어서야 한다. 대표 절차가 바로 국가 연구개발(R&D) 예비타당성조사(이하 예타)다.
그동안 국가 R&D 예타 제도를 돌아보면 번문욕례(繁文縟禮)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번거롭고 까다로운 절차와 예절을 뜻한다. 행정에서 지나치게 형식을 강조해 나타나는 비효율 현상이다.
미국의 한 사회학자는 이러한 현상을 17세기 영국의 공식 문서를 묶는 데 쓰인 빨간 띠에 비유하며 레드테이프라고 부른 바 있다. 이 단어는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규제 철폐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전 세계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동안 국가 R&D 예타는 성공이 불확실한 R&D의 성과가 미래에 창출할 경제 효과를 측정하는 경제성 평가에 치중했다. 당장 성과가 나타나기 어려운 기초 연구의 중요성이 저평가되고 조사 역시 장기간 실시됐다. R&D의 적시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국가 R&D 사업에 예타가 도입된 2008년 전후의 우리나라는 R&D 예산이 급격히 증가했다.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 경제성을 따지지 않을 수 없던 시대였다. 그동안 기획재정부가 국가 R&D 사업의 예타를 수행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R&D 투자가 적기를 놓쳤다는 비판의 근저에 번문욕례, 레드테이프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늘 하던 방식대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항상 최선은 아니다. 혁신은 늘 하던 방식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기술성 평가, 예타 대상 선정, 예타 조사까지 평균 1년 이상 걸렸다. 이 절차를 간소화해서 6개월 안팎으로 줄이겠다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계획이 반갑다. 변화와 도전을 통해 더욱더 전문가 관점으로 신속하게 국가 과학기술 전략을 결정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그러나 절차 간소화가 변별력 없는 시험이 되면 안 된다. 변별력은 경제 성과의 눈이 아니라 과학의 눈으로 판단돼야 한다. 경제 편익에 대한 소모성 논쟁보다는 R&D 과정의 위험 요소를 충분히 검토했는지, 어떤 혁신을 이룰 수 있는지 냉철히 판단해야 한다.
비용 대비 편익 비율이 꼭 1에 가까워야 좋은 R&D는 아니다. 과학기술 혁명은 알지 못하는 지식의 경계가 확장될 때 일어난다. 지식은 끊임없는 도전과 실패, 시간 축적을 통해 확장된다. 이때 단기 비용 대비 편익은 1을 넘지 못하다가도 장기로 보면 1을 훌쩍 넘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과학기술에서 보편 경로를 따라가는 전략이 항상 정답은 아니다. 평범할수록 평균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재능이 비범한 옥석을 가려낼 줄 아는 눈이 필요하다.
국가 R&D 예타는 현재 시점에서 미래의 불확실성을 예측하고 사업의 타당성을 확인하는 행정 절차다. 제도를 만들고 운용하는 정부는 제도의 효용성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개선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다.
앞으로 국가 R&D 사업 예타를 수행할 과기정통부가 예타 제도 혁신을 추진한다고 한다. 사업 유형에 따라 과학기술 타당성 조사를 강화하고 동시에 조사의 간소화·효율화를 추구한다. 과학기술 전략의 타당성 판단에 과학기술 전문성을 강조하겠다는 과기정통부의 포부에 기대를 걸어 본다.
이연희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수석연구원 lyhee@gstep.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