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보험업과 도매업을 제외하면 한국에 진출한 외국 법인 가운데 지난해 매출 5000억원이 넘는다고 신고한 기업이 전무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세 회피가 특정 산업에 한정되지 않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음을 보여 준다. 글로벌 기업의 조세 회피는 조세 정의, 이용자 후생에 악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한국 기업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최근 네이버가 구글을 향해 매출 및 세금 납부 자료 공개를 촉구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조세 회피, 산업 전 영역에서 문제
10일 국세청의 '외국법인 업태별 법인세 신고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한국 진출 외국 법인 1687개사 가운데 매출 5000억원이 초과한다고 신고한 사업자는 31개사뿐이다. 기업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가운데 도매업이 1개사, 금융·보험업이 30개사로 집계됐다.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이 포진해 있는 운수·창고·통신업을 포함해 다른 업종에선 매출 5000억원 초과로 신고한 기업이 단 한 개사도 없었다.
한국 시장에서 글로벌 기업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다. 우리나라에서 실제 연매출 추정치가 5000억원 넘는 기업은 다수다. 한국무선인터넷산업연합회에 따르면 구글과 애플은 지난해 애플리케이션(앱) 마켓에서만 각각 1조3396억원, 6061억원을 벌어들인 것으로 추산된다. ICT 분야뿐만 아니라 유통, 제약, 제조업 등 여러 분야에서 글로벌 기업의 한국 시장 지배력은 막대하다. 이를 감안하면 조세 회피가 광범위한 산업 분야에 일반화된 문제란 것을 알 수 있다.
글로벌 기업의 조세 회피 문제는 비단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만우 전 새누리당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13년 한국에서 매출을 올린 해외 법인 9532개사 가운데 전체 절반(49.9%)인 4752개사가 한국 정부에 법인세를 한 푼도 내지 않았다. 이 가운데 연매출 1조원 이상 기업은 15개사, 5000억~1조원 기업도 17개사나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조세 회피 핵심은 '소득 이전'
조세 회피 수법 가운데 가장 흔하게 알려진 것은 구글, 애플 등 글로벌 ICT 기업들이 이용하는 '더블 아이리시' 기법이다. 이 밖에도 다양한 조세 회피 기법이 존재한다. 핵심은 법인세율이 낮은 국가에 매출을 몰아주는 '소득 이전'이다.
인터넷 기업은 세법상 고정 시설을 둔 사업장이 없으면 소득에 과세하지 못하는 것을 악용한다. 현지에는 고정사업장에 해당하는 서버를 설립하지 않고 최소 기능만 수행하는 대리 회사를 세워서 과세가 가능한 이익 자체를 줄인다. 지식재산권(IP), 이자, 배당 등을 통해 법인세율이 낮은 국가에 세운 명목법인에 소득을 몰아준다.
조세 회피 기법은 업종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더블 아이리시 기법이 국제사회에서 주목받자 신종 조세 회피 기법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안창남 강남대 세무학과 교수는 “더블 아이리시 기법 외에도 새로운 금융 상품을 개발해 조세피난처와 연결시키는 신종 조세 회피 수법도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실질 과세 성과 아직 안 나와…올해 구글세로 재조명
조세 회피 방지를 위한 논의는 지속됐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는 없다. 지난 2014년 홍지만 의원(새누리당)이 구글과 페이스북 등 글로벌 인터넷 기업에 세금을 매기는 '법인세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우리나라에서 앱, 소프트웨어(SW) 제품이 판매된 경우 이를 외국 법인의 한국 내 원천 소득으로 간주해서 과세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심사 단계에 머물러 있다가 19대 국회 종료와 함께 폐기됐다.
올해 '구글세' 논란이 공론화되면서 글로벌 기업에 실제 매출에 합당하는 세금을 매기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올해 국세청은 세금 탈루 혐의로 3147억원의 법인세를 오라클에 부과했다.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도 올해 국정감사에서 “기획재정부와 국세청 등 세무 당국이 다국적 기업의 조세 회피 문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ICT뿐만 아니라 다양한 산업의 특성을 포괄하는 논의가 필요한 것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업계는 10월 공포된 '주식회사 등의 외부 감사에 관한 법률(외감법) 개정안'이 논의에 물꼬를 틀 것으로 기대한다. 이 법안은 유한회사도 외부 감사 받는 것을 의무화하는 것이 골자다. 2019년부터는 감사·공시 의무가 없는 유한회사 형태로 들어온 글로벌 기업 상당수가 매출 등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조세 주권 지키려면 갈 길 멀어
사회 공론이 모여도 조세 회피를 근절하긴 쉽지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소득 이전 기법을 활용한 세원 잠식(BEPS) 프로젝트를 제안, 우리 정부도 지난 6월에 서명했다. 동참하는 68개국이 서명을 완료하면 이들 국가 간 조세 조약은 별도의 양자 협상 없이 다자 협약을 통해 개정 사항이 자동 반영된다.
그러나 이를 제외한 국가에선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국가 간 조세 협약 자체가 이중 과세 방지를 위해 어느 한쪽에서만 세금을 추징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글, 애플, 아마존 등 거대 ICT 기업이 포함된 글로벌 기업 상당수가 포진한 미국은 BEPS에 동참하지 않았다.
조세 회피 문제 근절을 위해선 국제 사회와의 긴밀한 공조를 통한 지속된 노력이 필요하다. 유럽연합(EU)은 이익이 아닌 매출에 세율을 곱해 세액을 산출하는 '형평세'를 논의하고 있다. 서버 같은 유형 자산에 한정된 고정사업장 개념을 확장하도록 세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미 일본, 유럽 등 각국에서 고정사업장 해석을 확장하는 판례가 나오고 있다.
안 교수는 “현행 세법 규정은 제조업 중심 업종을 위해 설계돼 있어서 ICT 업체 상품(디지털, 인터넷거래)에 잘 맞지 않는다”면서 “고정사업장 개념을 확장, 소득이 발생한 국가에서도 과세가 가능하도록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 교수는 “EU에서 논의되고 있는 형평세 도입 문제를 우리나라에서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특별취재팀=안호천차장(팀장), 유선일·최호·권동준·정용철·오대석·최재필·이영호기자 hca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