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온뉴스 유지훈 기자] ‘고스트 라이터(Ghost Writer)’는 대필 작가를 뜻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유명 정치인, 기업인, 연예인들을 대신해 자서전을 써서 생계를 유지합니다. 상호간 협의된 일이기 때문에 문제될 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일이 ‘직접’ 가사를 써서 자기 생각을 노래하는 래퍼들 사이에 벌어진다면 어떨까요.
‘고스트 라이터’는 2008년 발매된 랍티미스트 두 번째 정규앨범 ‘마인드 익스팬더(Mind Expander)’의 열네 번째 트랙입니다. 지금은 이루펀트 멤버로 활동하고 있는 래퍼 키비와 헤리티지의 경선의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두 사람은 이제 막 데뷔한 언더그라운드 래퍼 A가 되어 주인을 잃어버린 자신의 가사를 찾기 시작합니다.
A는 브라운관을 통해 나오는 자신의 가사를 마주합니다. 그의 가사는 거리의 매장에서도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뜨거운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이겠죠. 하지만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A의 목소리는 뭔가 좀 시큰둥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A는 몇 달 전부터 시작된 불행을 더듬거리기 시작합니다.
A는 래퍼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고 클럽오디션을 전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무대에 설 기회를 얻게 됩니다. 기쁨도 잠시, 같이 오디션을 봤던 K가 다급한 목소리로 부탁을 합니다. “대신 가사를 써달라”고 말이죠. 음악적 성향이 맞지 않아 소원한 사이였던 K의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했고 설득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K는 완고했습니다. A는 불편한 마음과 함께 K의 고스트라이터가 됩니다.
A는 가사를 대신 써준 후 K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게 됩니다. “대형기획사에 합격했다”는 자랑이었습니다. 언더그라운드에서부터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 주목받고 싶었을 A는 K의 소식에 질투를 느꼈습니다. 음악을 먼저 시작했던 친한 형과 술잔을 기울이며 쓰린 속을 달랬습니다.
몇 달 후 A는 무심코 텔레비전을 켜고 큰 충격을 받게 됐습니다. K가 음악프로그램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던 것이었죠. 그 노래에는 K가 오디션에 합격하기 전, A가 써줬던 가사가 담겨 있었습니다.
미디어는 K를 ‘힙합의 전도사’ ‘천재’라며 극찬했습니다. A는 이를 지켜보며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분명 자신이 썼던 가사인데 모든 영광은 K에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연락하기도 힘든 인기를 누리고 있는 K, A는 텔레비전을 보며 울분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며칠 후 A는 K의 매니저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매니저는 사과는커녕 “후속곡 기사도 부탁한다”고 말했습니다. A는 이 요구에 응할 마음이 없었지만, 통장의 잔고를 보고 갈팡질팡하게 됩니다. 250만원이라는, 언더그라운드 래퍼로서는 쉽게 만져볼 수 없는 착수금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친한 래퍼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현실에 수긍하라는 조언 뿐이었습니다.
힙합신에는 분명 고스트라이터가 존재합니다. 미국만 해도 로이스 다 59가 닥터드레 노래의 고스트라이터였다는 게 알려져 있죠. 하지만 그들의 이런 작업 방식은 상호간의 협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또 닥터드레가 음악을 못하는 ‘만들어진 뮤지션’이라는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에는 우리가 모르는 좋은 음악을 만들 줄 아는 많은 뮤지션이 있습니다. 그들은 언더 혹은 인디라고 불리는 곳에서 아직 발휘하지 못한 재능을 갈고닦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A처럼 유혹의 손길을 받게 되죠. 우리나라 가요계에는 어쩌면 수많은 ‘고스트 라이터’ A와 만들어진 천재 뮤지션 K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자신문 엔터온뉴스 유지훈 기자 tissue@enteron.com/디자인=정소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