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온뉴스 이예은 기자] 국내 독립영화가 뒤늦게 개봉하는 일은 파다하지만, 이렇게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 ‘문영’은 ‘아가씨’를 통해 화려하게 데뷔한 배우 김태리의 작품이란 이유로 이 쉽지 않은 일을 해냈다.
단숨에 충무로의 기대주로 떠오른 김태리의 상업영화 데뷔 이전의 연기는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으며, 역시나 압도적인 연기를 펼치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사이에서 묵묵히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던 한 배우를 발견했다. 함께 투톱 주연으로 나섰던 배우 정현이다.
‘문영’은 문영(김태리 분)과 희수(정현 분), 두 여성이 내면에 숨겨진 상처를 끄집어내어 함께 연대해 성장해 나가는 작품이다. ‘문영’에서 정현은 날 것의 연기가 무엇인지 제대로 증명하듯이, 작품의 중심을 꽉 잡아주었다. 놀라울 정도로, 사실감 가득한 그녀의 숙련된 내공은 쉽게 표출된 것이 아니다. 고등학교 입학을 하면서 연극반을 접했고, 자연스레 대학까지 연기 전공을 가게 됐다. 이후 극단 생활부터 독립영화는 물론, 다양한 상업영화의 단역으로 등장하며 꾸준히 연기에 집중했다. 지금과 같은 큰 관심들은 그녀에게 얼떨떨하고 신기한 일로 다가왔다.
“지금처럼 인터뷰할 때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껴요. 그리고 ‘문영’ 덕에 GV 등 다른 일들을 할 때도요. 사실 독립영화는 저희끼리는 많이 알지만 일반 관객 분들은 잘 모르시잖아요. 그래도 저희끼리는 이슈가 많이 되어서 축하 문자도 많이 받았어요. 태리 효과도 있는데, 저까지 함께 잘 풀리고 있어서 다행인 것 같아요.(웃음)”
정현의 ‘문영’ 출연 계기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연출을 맡은 김소연 감독과 이전 작품의 인연으로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다가 희수 역으로 캐스팅 되었다. 시나리오가 끌려서 출연했지만, 내면의 상처와 외면의 활기의 간극이 현저하게 차이나는 희수를 연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감정 컨트롤을 잘 하려고 했어요. 희수가 기복이 많은 캐릭터잖아요. 하지만 희수 안에는 묵직함이 있어야 한다고 감독님이 부탁하셨어요. 그래서 그걸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개인적으로는 기분이 다운 안 되려고 애를 썼어요. 제가 무표정을 지으면 엄청 어두워 보여요. 그래서 다른 영화에서는 극단적인 역할이나 우울한 영화를 많이 찍었어요. 제가 기분이 떨어지면 영화에서도 시크하게 나올 테고 매서운 얼굴이 될 거 같아서 그렇게 안 되려고 대기할 때, 스태프 분들과 장난도 많이 치고 같이 놀았어요.”
극중에서 과하게 밝은 희수 캐릭터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종잡을 수 없는 인물’로밖에 표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문영과 희수의 첫 만남도 별나다. 희수와 그의 남자친구 혁철의 싸움을 목격한 문영이 버릇처럼 자신의 캠코더로 촬영했고, 그것을 희수가 발견했다. 그 때부터, 희수는 문영에게 다가가고 문영은 계속해서 밀어내지만 희수는 오히려 호기심만 가지며 매달리니, 그녀의 솔직한 감정을 제대로 읽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희수가 문영이를 봤을 때 느낌을 하나로 말할 수 없어요. 쪼개지는 것 같아요. 첫 만남에서는 격한 감정의 상태였잖아요. 8년 사귄 남자친구를 붙잡고 있었지만 그렇게 진심을 다 해서 잡지는 않았을 거예요. 희수 성격상 진심을 다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그것을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문영으로부터) 캠코더로 찍히니까 자신의 모습이 궁금했을 것 같아요. 문영이가 귀엽고 재미있기도 하고요. 희수는 전체적으로 흥미로운 걸 따라가는 친구라 그냥 문영이한테 다가갔을 거예요. 겁이나 거부감 같은 것 없이요. 그동안 희수는 항상 치부를 들키지 않기 위해 발악했거든요. 밝은 척 하면서 살았는데 하필 문영이는 항상 치부를 보이던 순간에만 등장했어요. 그 덕에, 점점 숨기고 있던 것을 꺼낼 수 있는 용기가 생기지 않았을까요?”
정현은 희수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나왔다. 극중 문영을 괴롭히는 결정적 존재인 아버지에게 희수가 식사를 차려주면서, 일부 관객들에게 원성 아닌 원성(?)을 들어야했다. 그에 대해 정현은 적극 해명했다.
“희수는 즉흥적으로 행동을 하는 친구에요. 그리고 부모님이 있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관계에 대한 개념만 있지 센스가 부족해요. 그저 문영이 아빠라는 개념은 있으니까 인사는 해야 하고, 아빠는 제정신인 것 같고 그런 상황에서 배는 고프고, 그러다 보니까 밥을 차려드렸을 뿐이죠. 그러다가 문영이 표정을 보고서 그때서야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았을 거예요. 원래는 문영에게 미안하다고 문자 보내는 신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부분이 사라졌어요. 희수도 힘들었을 거예요. 혼자 세상에 부딪히며 살아왔으니까 방식이 과장됐고 서투른 것뿐이거든요.”
얼핏 보면, ‘문영’이 마냥 우울하기만 한 영화 같지만 막상 스크린 앞에 앉으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객석 곳곳에서 계속해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물론 그 분위기는 희수의 독특한 행위들로부터 비롯된다. 혼자 춤을 추기도 하고, 전구를 감기도 하며 별난 대사를 뱉기도 한다. 이 장면들은 극중에서 문영이 희수를 촬영한 캠코더 영상 속에서 흘러나온다.
“실제로는 저 혼자 재미있었어요. 아무도 웃지 않으시더라고요.(웃음) 계속 혼자 장난 쳤죠. (김)태리가 잘 받아줘서 그나마 다행이었어요. 촬영장이 막 시끌시끌했던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굳이 하나를 꼽자면, 맥주 먹는 장면이 있는데 NG가 나면 계속 따야 하잖아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많이 땄는데 스태프들이랑 같이 마셨어요. 그 때, 프로듀서님이 발전기에 연결해서 오뎅탕을 끓이시고 안주를 만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캠코더 속 영상들 모두 태리 씨가 직접 돌아다니면서 찍은 거예요. 촬영 들어가기 전부터 혼자 찍으러 다니고 그랬어요.”
상대 배우인 김태리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었다. ‘문영’ 개봉의 일등 공신이기도 하며, 극중에서 희수와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붙어 있는 캐릭터다. 수월했던 희수 캐스팅 과정과는 달리 문영은 아주 오랜 시간 난항을 겪었다. 최종적으로 김태리가 캐스팅 되었을 때, 연기 경험이 거의 전무했던 배우에 대한 은근한 불안감도 있지 않았냐고 묻자 정현은 조금도 없었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문영의 역할을 뽑으면서 감독님이 정말 공을 많이 들였어요. 오디션이며 미팅이며 다 하셨는데 적합한 이미지도 찾기 어려웠고, 있다 싶으면 그 분 사정이 안됐고. 그런 고군분투를 거쳐서 만난 친구였는데 일단 무조건 ‘오케이’였죠 그 때, 문영 역할을 제외하고 모든 스태프들이 스탠바이가 되어 있던 상태였거든요. (김)태리 덕에 작품 자체도 한 층 더 밝아졌어요. 저는 태리 경험이 전무 하다고 해도 전혀 걱정이 없었는데, 스태프 분들은 걱정을 하시긴 했어요. 그런데 눈빛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그냥 하면 될 것 같다 싶었어요. 물론, (김태리가) 어려워하는 장면도 있었죠. 그 때마다 해내려고 정말 애쓰고 노력하더라고요.”
“사전 작업할 때도 감독님 집에서 와인과 맥주 한잔하면서 이야기 나누고 촬영장에서도 계속 나눴어요. 굉장히 똑똑한 친구였어요. (‘아가씨’ 캐스팅 소식을 듣고) 그렇게 될 거라고 예상이 들었을 정도로 강단이 있어요. 가끔은 무섭기도 해요.(웃음) 신념이 정말 강하고 자존감도 높거든요. 예를 들면, 저 같은 경우는 당당하게 물어보지 못하는 걸 (김)태리는 거침없이 해요. 아기 같은 얼굴에서 나오는 눈빛이 욕심과 야망도 느껴져서 해내겠구나 싶었어요. 그리고 보면 볼수록 신비롭고 예뻤어요. 저도 여배우 분들 많이 만나는데 예쁜 사람들 정말 많아요. 그런데 태리는 남다른 무언가가 있었어요. 제가 약간 바보 같아서 오히려 끌려갔죠.(웃음)”
김태리가 연기에 대한 야망이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정현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본인이 걸어온 연기 인생을 설명하는 모습은 열정이 가득했다. 연기를 할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시작하길 잘했다고 말하는 그녀지만 마냥 순탄치는 않았다. 그 탓에, 가족들은 늘 우려했지만 ‘문영’ 이후 반응이 달라진 듯 했다.
“말도 못해요. 안 맞아서 다행일 정도에요.(웃음) 엄마는 답답해하셨죠. 출근도 안하고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하니까요. 극단 생활할 때는 정말 모든 걸 풀가동시키는데 또 수입은 없었으니까요. 처음에는 믿어주셨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마찰이 많았어요. 제가 잔재주가 많거든요. 그래서 연기 포기하면 성공한다는 소리도 꽤 들었어요. 자격증 따려고도 해봤는데 제 마음이 도저히 안가더라고요. 다행히 아빠는 저를 끝까지 믿어주세요. 전혀 질책 안하시고 오히려 저보고 강하게 버티라고 하셨어요. 이번에 ‘문영’으로 부모님이 되게 좋아하셨어요. 그런데 일부러 저한테는 아무런 말씀도 안하세요. 그런데 주변 친구 분들한테는 다 자랑하셨더라고요.(웃음)”
상업영화를 향한 갈증도 가득한 정현은 분명히 올바른 욕심이 있었다. 단순히, 인기와 명성을 얻는 것을 떠나서 대선배들과 눈을 맞추며 연기를 해보고 싶은 것이 그 이유였다. 사석에서도 충분히 만날 수 있지만, 함께 연기 합을 맞추며 자신의 보완점을 알고 싶다고 말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검사외전’에서 함께 등장했던 황정민을 꼽았다.
“제 연기가 부족해서 욕을 먹더라도, 꼭 함께 대선배님들과 함께 하고 싶어요. 저는 조언을 받아서 강해지고 싶거든요. 어렸을 때는 무조건 사랑 이야기만 하고 싶었어요. 약간 나이가 먹으면서, 어두운 얘기를 하고 싶어요. 예술이라는 게 약자의 편에 서서 그걸 소재로 삼고 끄집어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송강호 선배님을 존경해요. 또 의외로 완전 엉뚱한 판타지도 좋아요. 미셸 공드리 감독의 ‘수면의 과학’이 ‘휴먼 네이처’ 같은 것들이요. 일반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고 싶기도 해요.”
‘문영’은 배우 힘을 무시할 수 없지만, 분명히 작품이 가진 힘도 있다. 잔잔하게 소통과 공감을 파고드는 이 작품의 저력을 대중들도 알아봤다. 개봉 17일 차로, 6000명(29일 기준)을 넘어섰고 개봉 첫 날부터 1000명을 넘기며 새로운 파란을 예고했다. 적은 상영관 수를 지닌 독립영화는 특성상 관객 수 1만 명을 넘기기 쉽지 않다. 이에 김소연 감독과 정현은 언론시사회 당일, 특별한 공약을 내세웠다. 김소연 감독과 정현은 현재 진행되는 ‘문영’ GV에 참여하고 있으나, 연일 바쁜 스케줄을 강행하고 있는 김태리는 참석이 어려웠다. 그래서 건 공약은 또 다른 주인공인 김태리를 초대해 함께 GV를 진행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실은 그냥 한 말이었어요.(웃음) 제가 언론시사회가 처음이라서 감독님 말씀을 따라했을 뿐이에요. 그런 질문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GV를 하면 저는 당연히 태리가 올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걸 공약으로 걸어야하는 건가 싶었어요. 물론, 시간이 되어야 올 텐데요. 태리를 사랑해주시는 분들이 워낙 많으니까 태리도 오고 싶지 않을까요? 첫 날 스코어가 1000명을 넘었다고 해서 저희끼리 만세 삼창 했어요. 또, 사인을 해달라고 하셔서 놀랐어요. 저는 사인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막 썼는데, 어떤 분이 ‘언니, 이거 뭐라고 쓴 거예요?’라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연습했어요.(웃음)”
정현은 대중의 눈에서 쉽게 띄지 않았을 뿐,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그리고 드라마에서까지 쉼 없이 활동하며 켜켜이 실력을 쌓아오고 있다. 정현은 ‘문영’이 곧 우리네 인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문영’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히, 정현 자신에게도 건네는 위로가 될 것이다. 진지함 속에 가미되어 있는 코믹함을 좋아해 이경미 감독, 봉준호 감독, 박찬욱 감독을 존경하고 강렬한 색을 지닌 故장진영과 장영남을 롤모델로 꼽은 정현은 확실히 세워둔 연기 소신이 있었다. 언젠가 그녀가 그 소신을 바탕으로 터뜨릴 ‘포텐’을 기대하고 싶다.
“‘그래도 살아야지’. 그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하나 성장하잖아요. 사실 ‘문영’이 지금 잘 되는 것도, 물론 우리 태리 효과도 있지만 작품 자체가 공감을 주는 것 같아요. 살아가면서 모든 이들이 힘듦을 느끼잖아요.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아등바등하며 버티고요. 그런 의미에서 ‘그래도 살아야지’ 이 말을 ‘문영’을 통해서 하고 싶어요.”
전자신문 엔터온뉴스 이예은 기자 9009055@entero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