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정부가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에 배정한 연구개발(R&D) 예산을 일정 비율 환수했다. 보통 R&D비 환수는 연구자가 연구비를 유용했거나 비리와 연루됐을 때 징벌 성격으로 이뤄진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지난해 초 R&D 예산 누수 방지를 위한 `국가 연구개발 연구비 비리 방지 대책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이뤄진 환수는 성격이 달랐다. 출연연에 배정한 예산 일부를 일률 회수했다. 과제를 진행하고 있던 연구원들은 황망했다. 한창 진행하고 있는 R&D의 예산을 덜어간 것이어서 상실감이 컸다. `출연연 R&D 과제를 바라보는 정부 측 시각이 이 정도냐?`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왔다.
이에 따른 출연연 연구원들의 사기는 크게 꺾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의연했다. 나라 경제가 안 좋으니 고통 분담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받아들였다. 부족한 예산을 같이 감내하며 고통을 분담하자고 했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최근 최순실 사태가 터졌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비리를 지켜보는 연구원들은 더 쓰리고 허탈해 했다. 환수해 간 R&D 예산이 생각한 것과 다르게 사용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좌절감이 더해졌다.
언제부터인가 과학기술계가 힘을 잃었다.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외풍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신세다. 변화와 혁신을 얘기하면서도 처음에는 정부의 입만 쳐다봤다.
내년도 과학기술 분야 R&D 예산이 올해 대비 20% 줄었음에도 불만을 토로하는 이는 없다. R&D비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는 데 동의하는 눈치다.
편을 들어 주던 과학기자도 눈에 띄게 줄었다. 과기계의 볼륨이 커졌음에도 영양가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얼마 전 경기도가 과학기술진흥원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과기계는 아무런 힘도 보여 주지 못했다. 당시 경기과학기술진흥원을 이끈 수장은 과거 과학기술계를 위해 헌신한 과학기자클럽의 회장 출신이었다. 과기계가 얼마나 무기력한지 적나라하게 보여 준 사례다.
원인은 내외부에서 모두 찾을 수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기정책이 바뀌면서 일관성을 잃은 것도 사실이다. 수장이 바뀌면 연구 시스템도 따라 변했다. 연구과제중심제도(PBS)처럼 두고두고 논란이 되는 제도도 적지 않다.
물론 잊을 만 하면 터지는 내부 비리가 신뢰를 무너뜨리거나 제 밥그릇 챙기기에만 바쁘다는 지적도 끊임없이 제기된다. 출연연이 반드시 걸러내야 할 부분이다.
이제는 과학기술계가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남 탓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먼저 보여 줘야 한다. 과학기술은 과기인들이 가장 잘 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은 과기계 내부에 있다. 최근 만난 한 출연연 원장이 역설한 과학기술 방향도 아주 명쾌했다.
정부 관료가 아무리 정책을 잘 만든다 해도 과기인들의 조언 없이 과기정책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치권은 더 모른다. 이들에게 과학 기술의 미래를 밝힐 수 있는 최적의 과기정책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책임 떠넘기기에 불과하다.
내년이면 차기 정부가 들어선다. 과기계가 한발 앞서 변화를 이끌 수 있는 목소리를 담아 내야 한다.
대전=김순기기자 soonk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