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온뉴스 이소희 기자] 데뷔 11년차를 맞은 배우 한수연에게 올해는 유독 ‘처음’이 많은 해다.
2008년, 퓨전사극이지만 추리수사물에 가까웠던 드라마 ‘별순검 시즌2’을 제외하면 최근 종영했던 KBS2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를 통해 제대로 된 퓨전사극에 첫 도전을 하게 됐다. 표독스러운 악역을 맡은 것도 처음이었다. 최근에는 데뷔 후 처음으로 포상휴가도 받아 필리핀 세부에 다녀왔다.
한수연이 세부를 다녀오고 며칠 안 되었을 때쯤, ‘구르미 그린 달빛’ 종영 인터뷰를 위해 그를 만났다. 단발 길이로 머리카락을 싹둑 자르고 상큼한 변신을 한 한수연은 화려한 가채를 쓰고 날카로운 눈빛을 짓던 극중 중전 김씨와 전혀 딴판이었다.
인터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한수연은 세부에 어머니를 모시고 가 함께 자유시간과 해양스포츠를 즐기며 휴식을 취하고 왔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후에도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수다를 떨 듯, 그러나 진지하게 자신의 연기 인생을 털어놨다.
◇ 한수연이 만들어 낸 중전 김씨
한수연은 2006년 영화 ‘조용한 세상’으로 데뷔했다. 이후 10년간 크고 작은 역할을 소화하며 다양한 작품을 거쳐 왔지만, 그리 만족스러운 인지도는 쌓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구르미 그린 달빛’이 시청률 20%를 돌파하며 이뤄낸 성과는 누구보다 남다르게 다가왔다.
처음 겪는 드라마의 폭발적인 인기에 부담스러울 법도 하지만, 한수연은 흔들림 없이 극중 역할을 분석하며 자신만의 중전 김씨를 만들어냈다. 중전 김씨는 이영(박보검 분)의 생모가 죽자 두 번째 중전 자리를 꿰찬 인물이다. 기생이 낳은 딸이자, 아버지 김헌(천호진 분)의 냉대를 받으며 자라와 인정받고 싶어 하고 독기와 오기로 뭉쳤다.
“아무래도 비주얼적인 것도 캐릭터의 모습이니까요. 눈빛과 목소리로 교태스러운 면을 보여주려고 했어요. 메이크업도 눈꼬리를 길게 빼고 입술도 붉게 칠하고요. 화려한 장신구랑 붉은 빛 의상도 한몫 한 것 같아요. 비록 극 말미 전까지 2벌로 의상을 돌려 입긴 했지만요. (웃음)”
중전 김씨는 드라마의 동명 원작인 웹소설에는 없던 인물이었기에 한수연은 어떻게 캐릭터를 받아들이고 연기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영화와 달리 촬영 날에 임박해 알 수 있는 대본 내용 또한 극복해야 할 어려움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니 ‘내가 이렇게 생각해서 연기하고 있는데 역할 성격이 바뀌면 어떡하지?’하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중전 김씨는 기생의 딸이어서, 나름 계산을 해 가끔 천박한 모습도 보여줬는데 나중에 이 비화가 안 나오면 어쩌나 싶었죠. 다행히 극 후반부에 밝혀지는 내용이 있더라고요.”
한수연은 악역에 대해 “긴장감을 주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공기를 갈아주는 역할이기 때문에 단 몇 분을 나오더라도 시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을 밝혔다.
실제로 한수연은 조연임에도 불구하고 등장 때마다 큰 임팩트를 남겼고, 끝까지 극을 이끌어가며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그렇다면 한수연이 이해한 중전 김씨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만약 제가 누군가에게 악역이라면, 세게 나가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고 조용히 잘근잘근 씹어 먹을 것 같아요. 웃으면서 사근사근 말하는 거죠. 그렇게 해보지는 않았지만...(웃음) 이런 톤을 유지하며 연기하면서도, 중전이기 때문에 나오는 고상한 면, 신분에 대한 자격지심, 중간중간 툭 튀어나오는 천한 피 등을 복합적인 감정을 보여주려고 했어요.”
◇ 한수연이 첫 악역을 이해하는 과정
제 아무리 악독한 역할이라고 해도 단순히 화를 내고 훼방을 놓으며 못되게 굴지 않는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부터 형성된 성격이 있다. 한수연은 이런 악역의 성장과정과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고 애정을 가졌다.
“악역이어도 제가 맡은 캐릭터면 사랑하고 불쌍하게 생각해요. 중전 김씨도 야망이 큰, 측은한 사람이라고 밖에 생각이 안 들어요. 하고자 하는 걸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며, 남의 시선의 기준은 없고 목표만 있는데요. 아버지는 중전 김씨를 중전으로 앉히며 도구로 이용하고 괴물로 기른 탓도 있는 것 같아요.
참 불쌍한 게, 이렇게 악하게 했던 게 다 본인한테 돌아갈 걸 알 텐데, 얼마나 비참해요? 연민을 가지게 됐어요. 또 사람이 선한 면도 있기에 중전 김씨도 나중에 모성애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거든요. 특히 출산 전까지는 권위와 힘과 ‘아이만 가지면 된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아이를 낳고 나서 힘을 잃게 되니 같은 여자로서 측은하게 느껴졌어요.”
아이뿐만 아니라 가족도 한수연을 울렸던 장면 중 하나다. 극중 중전 김씨는 아버지의 죄를 자신의 입으로 밀고하는데, 아버지가 죽을 것을 알기에 한수연은 눈물이 하염없이 났다.
한수연은 자신의 실제 성격과 중전 김씨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고 했다. 본인은 작업할 때는 최선을 다하지만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삶을 좋아하고, 불안에 시달리면서까지 행복을 찾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반대되는 면모는 한수연이 ‘아, 이런 사람들은 그럴 수 있겠구나’하고 더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었다.
◇ 흔들리지 않는 뿌리, 첫 개화를 하기까지
한수연 자신으로부터 출발해 탄생한 중전 김씨는 디테일하면서도 설득력이 있어 시청자들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때로 한수연은 ‘처음 보는 배우인데 연기 참 좋다’는 댓글을 발견하기도 했다. 데뷔 11년차 한수연은 이렇게 두 개의 ‘첫’ 작품을 갖게 됐다.
“이렇게 사랑 받은 작품은 처음이니까요. 작품의 수나 연기한 기간에 비해 인지도가 너무 없어서... (웃음) 그런 면에서 ‘구르미 그린 달빛’은 제가 대중에게 제대로 얼굴을 알릴 수 있게 해준 첫 작품이에요.
비록 많은 이들의 시선을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지만, 결코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다. “차근차근 가는 것이 좋다”는 한수연이 데뷔작 ‘조용한 세상’ 때부터 남다른 열정으로 내공을 쌓아온 결과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때는 자세부터가 남달랐다. 의자에 앉아서 모니터를 하는 것도 맘에 걸려서 쭈그려 앉아 모니터하고, 30분 넘게 조명을 설치하는 대기 시간에도 연기 감정을 잡았다. 이렇게 한수연이 너무 열정적이니 감독님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도 못했고, 마지막 촬영 끝나고는 60명이 넘는 스태프들에게 손 편지도 돌렸다.
“정말 무식하게도 일했지 싶어요. ‘겸손병’이라고 할 정도였죠. 하지만 그 때의 저는 현장과 제가 이런 초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고, 덕분에 지금의 좋은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제대로 된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되자’는 열정으로 시작했기에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고 올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이 말을 하는 한수연은 진지했고, 당시를 회상하며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10년간 끊임없이 물과 거름을 주며 뿌리를 단단하게 내려온 세월은 결국 ‘한수연’이라는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다.
전자신문 엔터온뉴스 이소희 기자 lshsh324@entero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