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기획┃재능기부②] 기부는 강요가 아냐… 씁쓸한 기부문화 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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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엔터온뉴스 DB, 본 기사 내용과 무관

[엔터온뉴스 최민영 기자] 지난 2014년 기타리스트 고의석 씨는 모 방송국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유명 성악가와 아프리카에 가서 열흘 동안 아이들에게 음악을 선물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 출연 제의였다.

고 씨는 출연료가 얼마인지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를 당황케 했다. NGO단체와 협업하는 기부형식의 프로그램이라 제작비가 넉넉하지 않아 출연료가 지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고 씨는 출연 제의를 거절했고, 하루 뒤 프로그램 제작은 무산됐다. 열흘 넘게 생업을 놓고 아프리카에 있어야 하는데 재능기부라는 명목으로 출연료를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말에 고 씨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고 씨는 “막내 작가와 계속 통화한 거라 방송국의 태도는 짐작만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보름 정도 한국을 떠나 생업인 레슨과 연주를 놓아야할 음악가에 대한 배려는 애시 당초 없었던 걸로 보였다”며 “오지로 보름 동안 사람을 보내면서 아예 임금이 책정되지 않은 상태로 뭔가를 시작하려했던 방송국의 태도가 상당히 불쾌했다”고 털어놨다.

대체적으로 경제적 상황이 넉넉하지 않은 예술가들은 재능기부라는 이름 아래 비슷한 강요를 많이 받고 있다.

이들은 ‘유명인 B도 지난번에 했고, 유명인 C도 이번에 제의를 수락했는데 네가 뭔데 왜 안 하냐’ 또는 ‘좋은 뜻으로 하는 거니까 봉사하는 마음으로 해라’ 등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난처한 상황에 놓인다. 제안을 받아들이기에는 조건이 내키지 않고, 거절하기에도 돈만 밝히는 예술가로 낙인찍힐 것 같은 찜찜함이 남기 때문이다.

기부는 어려운 이웃이나 공공사업을 돕기 위해 돈이나 물건 따위를 대가 없이 내놓는 행위이기 때문에 기부를 하겠다는 자발적인 의사가 동반돼야한다. 방송국이 고 씨에게 했던 행동은 재능기부 제의가 아니라 강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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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씨뿐만 아니라 재능기부 강요로 인한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례는 부쩍 늘고 있는 추세다. 훈훈했던 본래 뜻과는 달리 재능기부라는 단어는 그저 헐값에 노동력을 이용하려는 이들의 미끼로 변질됐다.

임기웅 영화감독은 “재능기부나 봉사를 제의할 때 업(業)으로 삼고 있는 분야는 되도록 자제해야한다. 노동이 무료로 제공되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라며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고 인건비가 점점 싸지는 지금의 재능기부는 노동착취의 또 다른 이름으로 작용할 우려가 크고 실제로도 그런 사례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동종업자에게는 재능기부가 해를 끼치는 시장교란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디에서는 공짜로 해주는데 여기는 그렇게 비싼 돈을 받느냐’라는 잣대가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며 “이렇게 된다면 좋은 뜻으로 재능기부에 참여했던 업자 역시 동종업계 사람들에게 눈총 받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올바른 재능기부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고 씨와 임 감독은 공통적으로 ‘관계’를 언급했다.

특히 임 감독은 “자발적으로 재능을 기부하는 몇몇 단체가 있는데 꽤 오랜 기간 형성된 좋은 관계를 기초로 하고 있다”며 “물론 관계 맺기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어려울 수도 있지만 이런 노력이 있어야 기부자는 각 단체가 추구하는 가치관 및 성향을 알 수 있고 거기에 바탕이 된 좋은 재능기부가 나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자신문 엔터온뉴스 최민영 기자 meanzerochoi@enteronnews.com